Wednesday, June 25, 2008

다시 네이버로

중국에 있으니 구글 블로그가 접속이 안 됩니다. 네이버 블로그로 다시 이사했어요. 흑흑. 진주현 닷컴으로 들어오시면 저절로 연결되게 해 두었습니다. 네이버에서 뵐게요.

Monday, May 12, 2008

Dinner Party

펜실베니아로 이사와 두 학기를 마쳤다.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들 덕분에 꽤 즐거운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곧 중국으로 몇 달 가 있어야 하니 아쉽기도 하고 해서 지난 금요일 저녁에 친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음식은 한국식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그 전날 장을 왕창 봐서 밤에 갈비 재우고 새우 껍질을 벗겨서 소금 후추 간을 해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막상 금요일에는 숙제 하나 할 것이 있어서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친구들이 도착한 7시까지 세 시간동안 눈썹을 휘날리며 음식 준비.



일단 시금치와 숙주 나물을 무쳤다. 아무래도 시금치를 잘못된 종류를 샀는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맛은 시금치인데 크기는 완전히 열대지방 코코넛 나무 잎파리 만했다. 돌이켜 보면 왜 그걸 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초대형 시금치를 데치느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냄비를 꺼내야 했다. 데친 후에도 먹기 좋게 송송 썰어줘야 했으니 참말로 귀찮았다!

다음은 김치전. M양이 예전에 추천해준 미국 손님 접대 음식이었는데 정말 미국애들이 잘 먹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도 만들기로 했다. 김치만 넣어서 만들어도 되지만 마침 양파 반쪽이 남았길래 그것도 송송 썰어서 넣었다. 계란을 넣으면 쫀득한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부침가루와 물만 사용해 부쳤다. 한 삼십 장쯤 부쳐서 오븐에 넣어두었다. 이건 엄마가 예전에 가르쳐주신 방법. 음식을 한꺼번에 다 만들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식은 음식을 내 놓을 순 없으니 오븐을 살짝만 예열해 그 속에 넣어두면 된다.

다음은 애호박전. 매번 미국 호박 사다가 계란물만 입혀서 부쳤는데 이번에는 한국 애호박을 사다가 제대로 부치기로 했다. 밀가루를 입혀서 계란물에 퐁당. 이렇게 하니 모양이 참 예쁘게 나왔다. 이것도 수십 개 부쳐서 오븐 속으로.

다음은 태어나 처음 만들어 본 소고기 깻잎전. 내 미국 친구들 중에 깻잎을 본 사람도 아무도 없었기에 웬지 친구들이 신기해 할 것 같아 만들기로 했다. 간 소고기에 두부를 반 모 으깨서 넣어주고 양파를 채썰어 넣은 후 만두 속 만들듯이 조물조물 반죽을 해 준다. 소금 후추로 간을 해 주면 끝. 밀가루를 깻잎의 한쪽에만 묻히고 반대쪽에 속을 넣어 깻잎을 도로록 말아준다. 그걸 계란물에 퐁당하여 바로 부치면 된다. 깻잎을 바라보던 내 친구들--"What is that?" 생깻잎을 하나 줬더니 조금씩 뜯어먹고는 너무 좋아한다. 향이 너무 좋아서 깻잎 향수를 만들어도 잘 팔리겠다나?!

홀리, 아냐, 테스, 제이슨, 가드윈, 크리스, 새라가 모두 도착. 갈비를 굽는 동시에 새우를 튀기기 시작했다. 튀김은 미리 만들어 두면 눅눅해 질테니 맨 마지막으로 만들었다. 어젯밤에 껍질 벗겨 손질해 놓은 새우를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 순서로 입힌 후에 기름에 퐁당퐁당. 자그마치 1킬로그램 어치나 튀겼는데 이날 새우는 바로 동이 나 버렸다. "와우~Is this 텐푸라?" 하면서 맛있다고 냠냠.

후식으로는 엉터리 방터리 수정과를 내 놓았다. 엄마 말로는 수정과에 곶감이 없으면 되냐고 하셨지만 감을 절대 안 좋아하는 내가 곶감을 살 수는 없는 일. 나는 생강을 별로 안 좋아해서 수정과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날 모인 내 친구들이 계피와 생강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 번 만들어봤다. 시나몬 스틱과 얇게 저민 생강에 물을 부은 후에 팔팔 끓이다가 설탕을 넣어 달달한 맛을 내 주면 끝. 생각보다 설탕이 많이 들어가야 그 맛이 나더군. 어쨌든 친구들은 수정과 한 대접을 다 비워주었다.

너무 음식을 많이 만든 게 아닌가 살짝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웬걸. 남은 것은 김치전 두 장과 깻잎전 하나 뿐.

-간장과 와사비. 와사비 가지고 장난 한 번 쳐봤다. =) 예전에 쟈니스 라켓인가 그 음식점에 가니 케찹을 저렇게 주더군.-

이날 밥 다 먹고 얘네들이 사 온 엄청난 술로 그야말로 파티를 벌였다. 맥주 한 박스 다 마시고 내가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 가져온 고량주 한 병부터 비우고. 으흐흐. 고량주 처음 마셔보는 내 친구들. 다들 그 다음날 고량주 때문에 속 뒤집어졌다면서 다시는 안 마신단다. ㅎㅎ 이번에는 자기네가 내가 안 마셔본 술을 먹여줘야 할 차례라면서 예거마이스터라는 술을 한 병 땄다. 진한 갈색의 이 술은 카라멜 냄새가 나는 물약과 같았다. 으...별로였음.

이 때 홀리가 데킬라에 타바스코 소스를 넣어 마시면 맛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몇 명이 뛰쳐나가서 데킬라를 사왔다. 그러더니 집에 있던 타바스코 소스를 정말로 섞는 것이 아닌가. 보고만 있어도 속이 이상했는데 다들 한 잔씩 마시기로 해서 나도 한 번 마셔봤다. 흠. 생각보다 맛이 이상하지 않았다. 데킬라의 강한 향과 타바스코의 매운 향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더군. 소주에 고춧가루 넣어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도 말하자면 이런 효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이렇게 신나게 놀다가 12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친구들이 가고 나는 그릇을 몽땅 디시워셔 넣어 돌려준 후에 잤다. 엄마 닮아서 쓴 그릇 그냥 두고 못 잔다. 윽.

이제 며칠 있으면 또 짐 한 보따리 사서 중국으로 간다. 짐 싸느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예전에는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 게 좋더만 이제는 늙었는지(!) 이렇게 정신 없는 게 싫다. 어쨌든 떠나기 전에 친구들과 미친듯이 재미난 시간을 보내서 좋았다. 오늘부터는 냉장고 비우기에 돌입.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지금 밖에 기온이 영상 2도 정도 밖에 안 된단다. 비는 부슬부슬 오고. 냉동실에 있는 닭가슴살 꺼내서 닭 칼국수나 끓여야겠다.

Wednesday, April 30, 2008

Last day of April 08

*드디어 이번 학기 중국어 마지막 시험을 끝냈다. Advanced Chinese였는지라 배우는 것들의 수준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다른 공부와는 또 다른 류의 고통이 아니던가. 매일 반복하는 것 이외에는 그야말로 왕도가 없는 언어 익히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선생님은 학생들을 달달달 볶았다. 그게 최고의 방법이니 선생님을 탓할 일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많은 시험과 숙제를 채점해 준 선생님에게 고마울 뿐. 약 50번의 수업 중 퀴즈가 16개, 큰 시험이 4개, 구두 시험이 2개, 짧은 수필 30개 쓰기, 책 숙제 4개, 그룹 발표 1번, 그리고 토론하기 4 번.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번 학기에 친구들이 나더러 "뭐해"라고 물으면 내 대답이 거의 틀림없이 "내일 중국어 시험 볼 것 공부해"였다. 어쨌든 고생이 약간의 빛을 발해 넉 달 전보다 중국어 실력이 팍 늘었다. 이제 시험은 다 끝났고 마지막으로 수필 10개만(!!) 더 쓰면 된다. 내일까지 다 해서 내야지.

5월 중순부터 중국에서 약 석 달을 머무를 예정인데 부디 중국어 실력이 팍팍 늘길 바래본다. 그나저나 북경 올림픽 때문에 서울에서 치고 받고 난리가 났었나본데 중국은 희한한 나라다. 티벳의 독립 문제는 이것저것 많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안이다 보니 나이브하게 "티벳을 독립시켜라!"만이 대수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치고 받다니 기가 막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한번 치고 받아주고 아르헨티나는 철통 경비 속에 또 비난 여론 속에 무사히 넘어가더니 한국에서는 다시 치고 받고. 내 중국 친구들은 메신저 이름들을 몽땅 "하트모양 China"로 바꾸고.

그 와중에 달라이 라마가 얼마 전에 시애틀 왔을 때 인터뷰를 들은 나는 참말로 실망하고. 워낙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진 까닭에 내가 지나친 기대를 했던 것일까. 솔직히 객관적으로 그의 인터뷰는 전혀 정신적 지도자의 인터뷰 같지 않았다. 티벳에서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이 엄청난 것이 기정 사실인데도 완전히 남의 집 불구경하듯 말하는 태도가 나에게는 무책임하게 보였다. 왜냐.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게 아닌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겉으로 말을 그리 하며 나 몰라라 나는 아무 영향력이 없어요만 강조하는 게 무책임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제는 오랜만에 된장에 무친 나물이 먹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시금치 한 단을 사다가 살짝 데친 후 나물을 만들었다. 뭘 섞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대충 양념을 만들었다. 엄마가 보내준 막장과 들기름 (들기름도 소포로 보내는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하다!!), 간장 약간 그리고 다진 마늘을 넣고 마지막에 깨소금을 뿌려 마무리. 깊은 맛 내지는 내가 기대하던 그런 맛은 아니었지만 봄맞이 나물로 꽤 괜찮았다. 냠냠.

<오늘 저녁 메뉴>

-검은 쌀을 섞은 밥: 검은 쌀도 엄마가 얼마 전에 한 줌 보내주심

-그저께 만든 닭수프: 감기 기운이 있어서 미국애들 방법을 또 다시 따라해 봄. 당근과 샐러리, 레몬즙, 다진 마늘과 소금, 후추. 정말 효과가 있는 것 같음. 미국표 닭죽이라고나 할까.

-오이지와 깻잎: 이것도 엄마가 얼마 전에 공수. 내 평생 우리 엄마표 오이지보다 맛있는 오이지는 먹어본 적이 없다. 서울 가면 꼭 배우고 말테야.

-김: 이것도 엄마가 보내주심. 김 이름이 무진장 긴데 생각이 안난다. 현미유로 구워서 바삭바삭 맛있는 김? 뭐 이런 거다. 요즘은 이름들이 희한하게 긴 게 많은 것 같다. 김과 깻잎을 같이 먹는 게 좀 이상한가. 뭐 어때. 맛있는데.

-파만 넣은 계란말이: 파는 한번 사서 왕창 다져 얼려놓기 때문에 파만 넣은 계란말이는 내가 가장 즐겨 먹는 반찬 중 하나. 이보다 쉬운 것이 또 있을까. 물론 돌돌 말다가 실패해서 열받아서 휙휙 마구 저어 스크램블을 만들어 버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ㅎㅎ

-어제 만든 시금치 된장무침

이 정도면 훌륭한 저녁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저녁에는 아냐네 집에 가서 카레를 만들기 시범을 보였다. 내가 지난 학기에 카레를 만들어 그녀를 초대했는데 한국식 내지는 일본식 카레를 처음 먹어본 아냐가 맛있다고 자기도 카레 블럭을 샀다. 그런데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아냐는 처음 시도해 보는 음식에 자신이 없다고 해 나를 특별 초빙했다. 으흐흐. 카레만큼 쉬운 음식이 어디 있나. 당근, 양파, 감자, 버섯, 샐러리, 닭가슴살 모두 오목오목 썰어주고 닭가슴살과 양파 먼저 버터 넣어 달달 볶은 후 나머지 다 넣고 볶다가 물 자작하게 붓고 뚜껑 덮고 15분 가량 기다린 후에 불 끄고 카레 넣어 녹여준 후 다시 조금 기다리면 끝!

다 써놓고 보니, 오늘이 시험인데 나는 어제 시금치 사다가 나물 만들고 아냐네 집에 가서 카레도 만들고. 완전 여유 만땅을 부리는 것을 보니 시험의 고수가 되었나보다!

Friday, April 25, 2008

Spring 08 Photos

--지금 막 시험 하나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짬을 내 사진을 정리 중--


아름다운 도시 밴쿠버.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이 위치한 곳에서 바라보는 밴쿠버의 경치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몇 년 전에 친구 가영이가 이곳을 구경시켜 주었었는데 다시 가 보아도 그때 그 감동이 그대로였다. 빅토리아 대학 인류학과 교수인 터키 친구 휼리아와 함께 다른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 예전예전에 M양과 미친듯이 쇼핑센터를 누비다가 발견한 빨간 손가방. 사람들이 어찌나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던지. 빈말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M양, 그대도 어여 하나 장만해!


니나 선생님의 비서로 일하는 테스. 내 바로 옆에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매일 보는 테스. 그녀가 없었다면 얼마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단조롭고 따분했을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그녀. 지난 금요일에 테스 부부와 함께 이 동네에 있는 테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저 뒷쪽에 보이는 푸르른 초원이 그 친구네 정원. 지질학자인 테스 친구는 취미로 조각을 만들고 도자기를 굽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집에 아예 화로까지 있고 지질학자의 지식을 동원해 이곳저곳으로 도자기 만드는 데 쓸 점토를 캐러 다닌다고 한다. 이 집 화장실에 갔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화장실에 떡하니 이구아나 한 마리가 있는 게 아닌가. 이구아나가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고. 변기 바로 앞에 버티고 있는데 정말이지 가슴 졸였다. 애완동물 '이키'란다.


긴머리는 도저히 내 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또 머리를 싹뚝 잘랐다. 층을 내면 모양이 나긴 하지만 조금만 길면 도무지 관리 불가 지저분 극치. 깔끔하게 잘라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몽실언니 내지는 양송이 버섯 같이 만들어주었다. 뭐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머리가 아닌가 싶다.

우리 연구실 포닥인 홀리가 결혼을 했다.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상당히 정형화된 데 비해 미국 결혼식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이번에는 100명 정도 하객이 모인 작은 야외 결혼식이었다. 음악 없이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신부 입장할 때는 홀리가 흥얼흥얼 "딴딴따다" 하면서 들어왔다.

이날 주례는 우리 과 대학원생인 제이슨이 맡았다. 제이슨은 홀리와 케빈의 친한 친구여서 발탁. 서로에게 편지를 쓰게 한 다음에 그걸 제이슨이 읽었다. 케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홀리 엄마와 친구가 직접 쓴 시를 한 편씩 읽고 그렇게 간소한 결혼식이 끝났다. 통째로 빌린 산 속의 산장에서 진행된 결혼식. 12시가 넘을 때까지 먹고 마시고 춤추고. 신나게 놀았다.

Tuesday, April 22, 2008

Bipolar

학기말이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미친듯이 바쁘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기절해 버릴 지도 모른다. 윽.

미국 오니 유난히 주변에 각종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정신과 상담 받는 것을 꺼려하지 않다보니 그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 숫자가 많아서이지 싶다. 복도 건너편에 있는 모 교수님은 심각한 바이폴라(bipolar) 증상으로 유명하다. 아마 우리말로 조울증이지 싶은데 본인도 괴롭겠지만 그 선생님과 어쩔 수 없이 의논할 것이 생기면 정말 골치가 아프다. 어제 무슨 일 때문에 그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하필이면 선생님 기분이 완전 바닥이었다. 다른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간 것이었기에 나는 단순한 전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나한테 아니 나를 향해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바람에 기분이 팍 상했다.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두둥. 바로 그 모 교수님이 나타나셨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한테 갑자기 한국어와 중국어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한글과 히라가나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기타 등등 질문을 하러 오셨다. 오늘은 또 기분이 완전 하늘을 날고 계신다. 조울증은 그렇다치고 워낙 아는 게 많은 선생님이어서 기분이 하늘을 날 때 대화를 하면 정말 재밌다.

꽤 심각한 조울증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내 주변에 몇 명 더 있다. 주의할 점. 그 사람 기분 안 좋을 때 나한테 성질 낸다고 맘 상하지 말 것. 그냥 기분이 나쁜가보다 하고 지나갈 것. 문제는 나도 사람인지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기분에 따라 나까지 오르락 내리락 했다가는 나까지 바이폴라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조심할 것.

Thursday, April 10, 2008

Biblical Archaeology


-펜실베니아가 본의 아니게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확정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면서 요즘은 매일 같이 라디오며 텔레비젼에 오바마와 힐러리 광고가 방송되고 있다. 오늘은 힐러리의 딸 첼시 클린턴이 캠퍼스를 방문해 연설을 한다고 한다. 학교 잔디밭에서 한다고 하니 조금 있다가 집에 가는 길에 슬쩍 봐야지. 사진은 힐러리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활짝 웃고 있는 여자 아이가 힐러리. 사진 속의 남동생과 아버지 모두 펜스테이트 졸업생이란다. 어린 시절의 일부를 펜실베니아에서 보냈다는 힐러리. 오바마가 아무래도 대통령 후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하지만 펜실베니아 사람들이 힐러리에게 얼만큼의 지지를 보내줄 지 궁금하다.

-지난 주말에 우리 랩 포닥인 홀리의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에 다녀왔다. 요즘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파티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 가 봤다. 결혼을 앞둔 신부의 여자 친구들이 신부와 먹고 놀며 결혼을 축하해주는 자리인 브라이덜 샤워. 결혼 선물 외에 브라이덜 샤워 선물도 사 가는 게 관례라고 한다. 포도주와 스낵을 곁들이면서 선물을 하나씩 풀어보고 함께 웃고 떠드느라 몇 시간이 흘렀다. 제일 웃긴 선물은 바로 속옷. 속옷 자체로는 웃길 게 없지만 친구들이 속옷 엉덩이 부분에다가 홀리 남편될 케빈의 사진을 집어 넣은 것! 다같이 친한 친구들이어서 그동안 찍어둔 사진 중에서 웃긴 것들로 골라 자그마치 일곱 장의 속옷에 모두 케빈의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선물 다 풀어보고 애비(우리 말로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좀 이상한데, Abby가 Abby의 이름이니...애비라고 하는 수 밖에!)가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저민 생강을 곁들인 햄구이, 감자 샐러드, 샐러드 그리고 아스파라거스. 후식으로는 정말 맛있는 라스베리 파이가 나왔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하니 여자 15명이 모인 자리는 어떠했겠는가. 다들 목청이 터져라 떠드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서도 귀가 윙윙거렸다. 오랜 만에 마음껏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번 주 내내 뼈다귀 랩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번 주의 과제는 염소와 양의 뼈다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염소와 양이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 뼈다귀의 구조가 놀랍게도 똑같다. 그래서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되는 염소와 양은 구별이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해 보는 것이 학자들 아니던가. 지난 100년 간 여러 명의 학자들이 이 문제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허나 염소와 양은 여전히 골치거리이다.


염소와 양이 널리 퍼져 있던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특히 염소와 양을 구별해 내는 것이 중요할 때가 많다. 이번 학기 프로젝트로 분석하고 있는 뼈다귀는 이스라엘의 텔 단(Tel Dan. Tel은 많은 지명이 붙여지는 단어로 언덕을 의미한다)이라는 곳의 신전에서 발견된 것들로 기원전 8세기 경에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 뼈다귀들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은 성경이라는 문서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분석하는 게 재미나다. 텔단 유적은 성경 여러 곳에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된다.

창세기 14장 14절.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포로로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 집에서 낳아 훈련받은 사람 318명을 거느리고 까지 쫓아갔습니다.

여호수아 19장 47절.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이라 하였더라"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구절은 바로 금송아지 부분이다.

열왕기상 12장 26-33절.
"여로보암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갈 것 같다. 이 백성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의 주인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왕은 조언을 구한 뒤에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너희에게 큰일이다. 이스라엘아, 여기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너희 신들이 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에 두었습니다. 이 일은 죄가 됐습니다. 백성들은 멀리 에까지 가서 그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텔단 유적에서 금송아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윗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돌에 새겨진 문서가 나왔고 이번 학기에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동물 뼈다귀들이 수천 개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특히 양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양의 뼈다귀들의 상당수에 당시 제사장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칼자국이 나 있다. 양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도살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자국들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문서이니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 게 당연하고 거기서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니 동물 뼈다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데 그래도 웬지 신기하고 재미나고 그렇다.

Tuesday, April 1, 2008

Long time no see


-요즘은 눈썹이 휘날리게 바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을 하고 있다.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인터넷 서핑할 시간조차 나지 않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5월달에 서울 거쳐 중국으로 간다. 이번이 마지막 논문 자료 수집이라고 각오하고 가는 것이기에 아주 사소한 것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를 해야 한다. 막상 가서 '어라. 이걸 생각 못 했네' 이러면 아주 곤란하니까. 사소하게는 뼉다귀에 번호를 적기에 가장 적합한 펜부터 시작해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만들고 있는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램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컴퓨터로 워드 문서 만들고 엑셀 통계 돌리고 포토샵 작업 하고 파워포인트 만드는 것을 주로 했지 데이터 베이스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집하는 자료가 방대하게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데이터 베이스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과감히 뛰어들어보기로 했다. 까짓거 만들어보자. 끄응. 눈이 토끼눈이 될 때까지 컴퓨터를 붙들고 앉아서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면서 애꿎은 컴퓨터를 두들겨 부셔 버리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였던가. 드디어 데이터 베이스를 대충 완성했다. 마이크로 소프트 액세스라는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엑셀의 단점을 놀라울만큼 완벽하게 보충했으며 그 자체로도 상당히 훌륭한 통계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원하는대로 만들 줄 몰라 너무 속상했는데 이제는 가지고 있는 옷이나 신발도 데이터 베이스 만들어 저장할까 하는 황당한 생각마저 해 본다.

-밴쿠버에서 열린 학회에 잘 다녀왔다. 마침 밴쿠버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도 다녀왔고. 학회에서 심포지엄 끝나고 교수님들이 막 나한테 와서 자기 소개를 하며 악수를 청하는 게 기분이 제일로 좋았다. 내가 늘 먼저 나를 소개하고 악수했지 이런 적은 없었기에. 이번에 학회에서 발표한 것을 꽤 좋은 저널에 출판하기로 했다. 으흐흐. 남은 기한 한 달. 윽. 아직 서론도 시작 안 했는데.

-니나 선생님이 몇 가지 일을 부탁하셔서 그것하느라, 중국어 공부 하느라, 새로 산 접사렌즈로 사진 찍는 연습하느라 기타 등등.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새로 생긴 버릇이 있다. 쉬고 싶을 때 예전에는 음악을 들었는데 이제는 그냥 아무 소리 안 나는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는다. 머리 속을 텅 비워보려고 노력을 한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어느날 공중 부양하고 도사되는 거 아닌가.

-머리도 식힐 겸 어제는 아이작 펄만 콘서트에 다녀왔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아이작 펄만과 단짝을 이루어 함께 다닌다는 로한 데 실바라는 스리랑카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함께 왔다. 둘다 쥴리어드 음대 교수이다. 아이작 펄만은 전동 스쿠터 같은 것을 타고 나와 거기에 앉아서 연주를 했다. 바흐 한 곡 하고 현대 음악 두 곡 하고. 마지막 곡은 여러 개의 짧은 곡들을 아이작 펄만이 직접 소개해 주고 연주했다. 어찌나 유머 감각이 뛰어난지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계속 웃었다. 노장의 땀방울을 가까이서 보고 말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가고 그나마 한 개 남은 자리 겨우 구해서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천장에 가까운 곳에서 연주를 감상했다. 다음 주에는 에비타 뮤지컬이 온다. 바빠서 갈까 말까 했는데 이럴 때 일수록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겠다 해서 가기로 했다. 마돈나가 노래를 잘 해서 그런 것일까. 영화 에비타 속의 노래들이 참 좋았는데 뮤지컬로 본다니 기대가 된다. 작은 동네 살다보니 이런 좋은 공연이 오면 놓치지 않고 가게 되는 장점이 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고 값도 싸다~으흐흐.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단다.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이 된다. 사람이 늙는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어딘지 불쌍해지는 것 같다.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피자를 사 와서 혼자 드시는 것을 보았다. 피자를 한 손으로 들고 그걸 입에 가져가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가 많이 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피자를 겨우 입으로 넣는 그 모습. 그걸 다 드시고 지팡이 짚고 다리도 후들후들 하며 쓰레기통으로 가 빈 종이 접시를 버리고 아주 천천히 걸어가던 그 미국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왜 그리 처량해 보이던지. 아...그 할아버지에게도 나 같은 팔팔한 청춘이 있었겠지. 시간은 멈추는 것이 아니니 젊을 때 혈기가 넘칠 때 더 씩씩하게 살아야겠다. 그나저나 이번에 밴쿠버 다녀와서 불과 세 시간의 시차를 극복하는데 자그마치 사흘이나 걸린 것을 보면 나도 이제 서른 살이 된 것이다!

-밴쿠버에서 돌아와 보니 우체통에 익스프레스 메일로 소포가 왔으니 우체국에 와서 가져라가는 쪽지가 있었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소포를 보낸 것일까. 우체국에는 포장부터 아기자기하게 예쁜 소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일본에서 온유 언니가 또박또박 빼곡하게 카드 한 장과 함께 일본 과자를 보내준 것이었다! 이제 다섯 달 된 아들이 있고 동경대 연구실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온유 언니. 아기 키우랴 연구하랴 얼마나 바쁠텐데 그 와중에 나를 생각해서 비싼 익스프레스 메일로 카드와 과자를 보내주다니. 일본 과자답게 포장도 진짜 깔끔하고 예뻤다. 언니 고마워요!

Tuesday, March 11, 2008

Oyster sauce & Red wine

-중국 남쪽 광동성 지방 요리에 특히 많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굴소스이다. 미국에 와서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마다 굴소스를 넣으면 음식이 맛있어진다길래 나도 한 번 사 봤다. 역시나 명성대로 맛있었다. 특히나 굴소스에 백포도주를 곁들여 버섯 파스타를 만들면 환상의 맛이 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2005년 어느날부터 굴소스를 먹으면 바로 머리 뒷쪽이 심하게 당기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설마 무슨 굴소스 때문에 머리가 아파'하면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굴소스가 들어간 줄 모르고 먹었던 음식도 먹고 나면 머리가 아파왔다. 이게 흔히 말하는 그런 두통은 아니고 그야말로 뒷골에서부터 목까지 싸하게 당기는 그런 류의 두통이다. 얼마 전에 아냐가 무슨 요리를 해 와서 나눠줬는데 먹고 나서 바로 그런 싸한 두통이 오는 것이었다. 여기 혹시 굴소스 들어갔냐고 물었더니 아냐가 제일로 좋아하는 소스가 굴소스여서 당연히 넣었다고 했다. 역시나 그 희한한 두통은 굴소스로부터 오는 것이 틀림 없었다.

-나에게 두통을 주는 또 하나의 먹거리가 있으니 바로 적포도주이다. 웬만해서는 술을 마시고 머리가 아픈 사람이 아닌데 적포도주만큼은 한 잔 넘게 마시면 머리가 띵하게 아프곤 했다. 그래서 우아하게 와인이나 한 잔 하는 것을 아쉽게도 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 랩미팅 시간에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니나 선생님께서 나의 증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셨다. 평소에 식재료 및 요리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신 니나 선생님. 게다가 홍콩에 10년 넘게 사셨기 때문에 굴소스에 대해서도 참 잘 아시는 선생님. 이런 류의 증상이 나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란다. 전통 굴소스는 그야말로 굴로 만든 소스인데 시중에 시판되는 것들은 대개가 약간의 굴소스 혹은 굴맛 소스 (잘 보면 "oyster-flavoured sauce"라고 적힌 것도 많다)에다가 기타 등등을 첨가한 것이란다. 그 기타 등등 중 하나가 니코 어쩌고 하는 성분인데 이것이 바로 적포도주에도 그 색을 보존하기 위해 똑같이 들어간단다. 바로 이 니코 어쩌고가 몸에 그다지 좋은 성분은 아닌데 나처럼 니코 어쩌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니코 어쩌고 때문에 나타나는 두통은 특히 나이가 들면서 그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거나 더 심해진다고 한다. 으악! 나도 늙어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무엇이든 잘 먹으면 좋겠지만 진짜로 머리가 아픈 것을 어떡한담. 안 먹는 수 밖에.

-여름 계획을 다 세웠다. 올 여름에는 산동성에서 한 달 운남성에서 두 달을 보낼 예정이다. 올해 운남성에서의 일정은 작년과 달리 발굴 없이 나 혼자 자료 수집을 마쳐야 하는 따분한 일이기 때문에 그 때가 심적으로 견뎌내기 힘든 기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디 이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자료 수집 모두 마쳐서 하루 빨리 졸업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일주일 간의 봄방학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학교 안 가고 집에 있으니 좋군. 다다음 주에 밴쿠버에서 있을 심포지엄 준비하느라 정신 없다.

Saturday, March 8, 2008

Coupon & Sale



-미국 와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쿠폰과 세일의 문화였다. 한국에도 물론 쿠폰이 있고 깜짝세일이 있지만 미국만큼 그 빈도가 잦지도 않고 파격 세일이 많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얼 하나 사려고 해도 일단 인터넷에서 쿠폰을 뒤지기 시작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치 쿠폰을 찾아내지 못하면 괜히 돈 더 주고 산 것 같은 억울함까지 드니 미국은 진정한 쿠폰의 나라이다.

*지난 여름에 엄마 아빠가 미국에 오셨을 때의 일이다. 마침 작년이 엄마 아빠의 결혼 30주년이었기에 동생과 나는 돈을 모아 괜찮은 트렁크를 선물해 드리기로 했다. 가게에 가서 트렁크를 고른 후에 내가 돈을 냈는데 돈을 내면서 "부모님께 결혼 30주년 선물 사 드리는 거에요"라고 말했더니 그 점원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착한 딸이네요" 하더니 보너스라면서 10퍼센트를 할인해 주었다. 이게 웬 떡인가! 그 날 나는 학교로 돌아가고 엄마 아빠 두 분이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셨는데 가방 점원에게서 힌트를 얻은 우리 아빠. 백화점 직원에게 할인쿠폰 같은 거 없냐고 물으셨단다. 그 덕분에 며칠동안 모든 물건을 할인 받을 수 있는 여행객 쿠폰을 받아 그렇잖아도 즐거운 쇼핑을 더더욱 즐거운 쇼핑으로 만드셨다.

*며칠 전에 일회용 콘택트 렌즈를 주문했다. 30개 들어있는 한 박스를 인터넷을 통해 싸게 사면 하나에 18불 정도 주면 된다. 그런데 안과에서 자기네를 통해 주문하면 무슨 특별할인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귀가 솔깃해졌다. 한 박스에 원래는 21불인데 그걸 6 박스 이상 사면 25퍼센트를 일단 할인해 주고 그 다음에 특별 어쩌구 저쩌구로 55불을 그 자리에서 깎아준 다음에 또 특별 어쩌구 저쩌구 기간이어서 할인을 더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년치 24박스를 샀는데 인터넷으로 사면 432불을 줬을 것을 쿠폰에 할인을 더해 248불에 샀다! 결국 한 박스에 10불 정도 준 셈이니 이런 파격 할인이 또 어디 있을까.

*가끔씩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사곤 한다. 내 사랑 제이크루닷컴에 들어가서 세일 코너를 돌아보다가 파격 세일 블라우스를 발견했다. 색도 예쁘고 디자인도 괜찮아서 장바구니에 담아주고 빨간 색 티셔츠도 맘에 드는 게 있어서 그것도 하나 더했다. 그랬더니 배송비가 8불 정도 붙었다. 혹시나 해서 구글에 가서 '제이크루 쿠폰'을 검색했더니 무료 배송 쿠폰이 있었다. 그 쿠폰에 나와 있는 번호를 넣었더니 바로 8불이 0불로 바뀌었다. 결국 배송비 무료!

*예전에 엔진오일을 갈기 위해 펩보이즈에 갔다. 차 상태를 총점검하기 위해 이것저것 해 달라고 하면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차 상태를 점검해 주는 패키지가 비싸네요. 혹시 이 패키지 사면 쿠폰이나 이런 거 안 주나요?" 그랬더니 이 직원이 "오케이! 다음에 오면 엔진 오일 공짜로 갈아주는 쿠폰 줄게요." 물어보는 그 순간은 늘 스스로 좀 구질구질하고 치사하게 느껴지지만 이렇게 필요한 쿠폰을 받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물어봐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건강을 위해 특별한 것을 챙기지는 않지만 종합 비타민은 그래도 꾸준히 먹고 있다. GNC에 비타민을 사러 갔는데 얼마를 내면 일년동안 골드회원이 되어서 모든 물건을 20퍼센트 할인해 준다고 했다. 계산을 해보니 그날 당장 회원가입비를 내도 그보다 더 큰 금액을 할인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회원 가입을 했다. 그날 GNC에 가기 전에도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GNC 쿠폰'을 검색해서 5불 할인 쿠폰을 받아둔 상태였다. 그리하여 또 파격가로 비타민 구입!

*세일은 또 어떤가. 얼마 전에 우리 동네 하나뿐인 쇼핑몰에 있는 메이시스에 갔더니 구두 파격세일이 진행 중이었다. 몇 달 전에 보았던 예쁜 구두들이 있었는데 80불짜리가 19불 99가 되어 있었다. 이게 또 웬 땡인가. 아싸리! 난생 처음 빨간 구두도 한 켤레 사고 편한 단화 한 켤레도 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무얼 사러 가든지 간에 쿠폰을 일단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쿠폰을 가지고 가서 할인을 받으면 기분이 참 좋다. 하지만 때로는 이게 귀찮기도 하고 쿠폰 없이 물건을 사려면 꼭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기분마저 들 때가 있다. 그래도 쿠폰을 잘 찾으면 꽤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검색하고 볼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양파 2개 값으로 양파 3개 사세요" 이런 식료품 쿠폰은 잘 활용하지 못하는 편이다. 혼자 살다보니 양파 2개도 3개도 필요가 없을 뿐더러 식재료를 워낙 조금 사다 보니까 어딜 가서 사든지 가격차이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국은 쿠폰의 나라이고 세일의 나라이다 보니 좋든 싫든 앞으로도 이곳에 사는 한 열심히 뒤지고 오리고 모으는 인생이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Tuesday, March 4, 2008

March 4th, 2008

*어제 카일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탠포드 있을 적에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카일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약 1년 간 현지조사를 마치고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녀. 이래저래 수다를 떨다가 우리와 함께 대학원을 시작한 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앤은 시작은 우리와 같이 하였으나 다른 학교에서 석사를 마친 상태여서 우리 동기들보다 여러 모로 앞선 상태였다. 유학온 이후로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앤도 그 중 하나이다. 그녀의 연구실은 내 연구실 맞은 편에 있었는데 아침에 비교적 일찍 나가던 나보다도 더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앤이었다. 앤은 스탠포드로 옮긴 지 1년 정도 지나 결혼을 했고 그 다음 해에는 버클리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남편이 산호세에 있는 대학에 취직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 없이 일하곤 했던 앤은 전형적인 그야말로 당당한 여성이었다. 부당한 일을 겪으면 절대 가만 있지 않고 전투적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서 항상 나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 앤이 작년에 예쁜 딸을 낳았고 학생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금액의 연구기금을 따내서 스탠포드에 고대DNA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렇잖아도 여러 가지로 존경스럽고 부러운 앤이 글쎄 얼마 전에 드디어 박사 논문을 완성한 것도 모자라 그 유명한 학술잡지 "싸이언스"에 단독 저자로 논문을 실었단다! 축하축하 또 축하할 일이다! 카일리랑 나랑 둘다 너무 부러워하면서 신세 한탄 시작. 우리는 이게 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일리 또한 보통이 아니다. 윽. 분발해야해!

*아침에 학교에 와 보니 반가운 선물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사진 찍는 솜씨가 그야말로 예술인 R언니가 멀리멀리 싱가폴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뽑아서 보내주었다. 그것도 진짜 좋은 종이에 현상 자체도 예술작품처럼 해서. 내 원래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언니의 작품은 참 놀라울 만큼 아름답다. 어떤 액자에 어떻게 담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고마워요 언니!

*<북경자전거>라는 중국의 독립영화를 한 편 봤다. 하도 그 영화 좋다고 하길래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는데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내용은 어쩌면 그리 우울하며 아무리 저예산이라고 해도 좀 심했다 싶었고 설정이 괜찮았기에 얼마든지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까지 남았다. 중국어 수업 시간에 또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기가 막히게 재미가 없다. 중국어 공부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능력이 떨어지나보다.

*아싸리~다음 주면 봄방학이다!

Wednesday, February 27, 2008

Classical music


-그저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나는 유투브가 아무리 대세라 하여도 동영상 보는 것에 별로 취미가 없는데 이 동영상 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아리랑을 연주하는 부분을 봤는데 마음이 찡했다. 아리랑이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인 것은 맞지만 솔직히 내가 어렸을 때 아리랑이 심금을 울린다던가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뉴욕필이 평양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괜히 슬퍼지기까지 했다. 원래 아리랑의 음색이 슬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면 한국 사람은 저절로 아리랑에 심취하게 되어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겹쳐져서인 것일까.

-그저께 평양에서 지휘한 로린 마젤이 예전에 요요마의 첼로와 함께 베를린필을 지휘할 때 녹음했던 음반 중에서 드보르작의 첼로 콘체르토 B 마이너가 있는데 그 음반을 요 며칠동안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이유인 즉슨 어제 그 노래를 들으러 갈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 폰티가 지휘한 국립 러시아 교향악단이 이 동네에서 어제 연주를 했는데 우리 과 삼총사 나, 아냐, 그리고 새라가 함께 갔다. 학생은 반값에 할인 티켓을 구할 수 있는데다가 무대보다 천장과 더 가까운 엄청 뒷쪽 아니 뒷쪽이면서 윗쪽인 곳에 좌석을 구매해서 얼마 들이지 않고 멋진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드보르작은 훗날 자기 형제의 아내가 된 여인(영어로 sister-in-law라고 되어 있어서 형의 아내인지 동생의 아내인지 모르겠다. 그 바람에 이런 어색한 표현을...양해 바람!)을 열렬히 사랑했었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애정은 평생동안 식지 않았는데 그녀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 노래를 작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드보르작이 이 곡을 보다 즐거운 멜로디로 계속해서 고쳐나갔다고 한다. 첼로로는 콘체르토를 만들 수 없다는 평생의 신념을 가졌던 드보르작이 결국 그 신념을 굽히고 자신이 사랑했으나 함께 할 수 없었던 여인에게 바치려고 작곡한 곡. 독일 출신의 젊은 첼리스트 클라우디오 보호르께즈가 첼로 독주를 맡았다. 우리 아빠가 좋아하시는 신세계 교향곡도 그렇고 이 노래도 그렇고 드보르작의 노래는 참 아름답다.

인터미션 뒤에 이어진 곡은 차이코스프스키의 심포니 4번 F 마이너였다. 얼마나 심하게 차이코프스키스러운지 늦은 시간이어서 솔솔 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팀파니 마구 두들겨 주고 커다란 베이스 북도 두들기고 심벌즈도 계속해서 꽝꽝. 잘 모르는 노래였는데 3악장도 참 재미났다. 서른 개가 넘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비올라, 첼로 그리고 8대의 베이스가 뚱뚱뚱뚱 계속해서 피치카토로 현을 튕기는 것이 재미났다. 바순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으며 오보에와 클라리넷도 참 듣기 좋았다. 플륫은 여전히 별로 그냥 그랬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취향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는 차이코프스키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운명이라며 그를 열렬히 따라다닌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차이코프스키와 그녀는 결혼을 하였으나 그 결혼이 원만할 리가 없었다. 결국 차이코스프스키는 그녀를 떠났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어서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가 바로 이 곡.

-엄마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많은 클래식을 듣고 자랐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서 클래식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냥 들으면 잠이 솔솔 오고 마음이 편해지니 좋았다. 하지만 유학 나와서 할 일이 별로 없어지면서 생긴 좋은 친구가 클래식 음악이다. 사실 아직도 모르는 노래가 훨씬 많지만 하나씩 배워가는 것도 재미나고 진심으로 노래가 좋아서 듣는 그런 기분도 좋다. 4월 1일에는 그 유명한 아이작 펄만이 온단다. 줄리어드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니 이곳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나보다. 삼총사가 그날 또 같이 가기로 했다. 무슨 곡을 연주하려나. 그 날은 꼭 맨 앞에 앉아서 노장의 땀방울까지 보고 말리라.

-약 한 달 전에 제출한 연구비 기금 프로포절이 통과 되어서 소액의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 조금 전에 중국어 시험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이런 기쁜 소식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Saturday, February 23, 2008

Amish

어제는 우리 과 학생들이 이 동네로부터 약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미쉬(Amish) 마을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대학원생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약 40여 명이 함께 찾아간 곳은 미국 사람 눈으로도 신기하다니 나같은 한국 사람 눈으로는 더더욱 신기한 그런 곳이었다.


-아미쉬 어린이들. from wikipedia.org-


일단 그 동네에 들어서자 사방 팔방이 깜깜했고 군데군데 마차가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요더(Yoder)씨네 집이었다. 턱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도록 기른 나이 지긋한 요더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했고 집에 들어서자 하얀 모자를 쓰고 파란 단색 원피스를 입은 요더 아주머니와 요더씨의 딸들이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까만 바지에 파란 단색 남방을 받쳐 입고 멜빵을 한 요더씨의 아들과 손자도 부엌일을 거드는 중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옆으로 길쭉한 테이블에 40여 명이 앉자 요더 아저씨는 그 우두머리 석에 앉으셨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셔서 우리 모두 식사 기도를 했다.

이날 나온 음식은 물론 모두 집에서 재료의 수확에서부터 끝까지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는 버터도 요더씨네가 기르는 소의 우유로 만든 것이었고 딸기잼도 직접 수확한 딸기로 만든 것이었다. 줄기콩과 간소고기를 볶은 것, 매시 포테이토, 고구마 으깬 것, 소고기 스튜, 크림소스 파스타, 오색 야채로 만든 피클이 주메뉴였고 후식으로 사과파이, 치즈케잌, 초콜렛케잌과 달달하게 절인 배에 커피가 곁들여 나왔다. 정말 맛있었다. 후식을 마치자 멜빵을 멘 아미쉬 손자들이 우리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Amazing grace" 찬송가가 인쇄된 종이였다. 요더씨의 지휘 하에 우리 모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러야 했다. 그 다음에 요더 아저씨는 우리에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어디 출신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를 말해달라고 했다.


-아미쉬 마을의 옥수수 수확-


이런 신기한 삶을 사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미쉬는 18세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스위스-독일 (가끔씩은 네덜란드)계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종교인데 이는 기독교와 매우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극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내에만 약 20만 명의 아미쉬가 살고 있으며 이들은 인구 증가가 가장 빠른 집단 중 하나라고 한다. 오하이오주에 가장 많은 아미쉬가 있다고 하고 그 다음이 펜실베니아라고 한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철저히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산다. 사유 재산을 최소화 하고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이들은 전기도 자동차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요더씨네 집을 밝히고 있는 것은 몇 개의 촛불 뿐이었다. 기계의 사용 역시 최소화 한다고 하는데 이는 기계에 의존하게 되면 그만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공동체의 의미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입는 옷도 단색인데 대부분이 짙은 파란색이나 검은색이며 남자들은 거의 멜빵을 한다. 입는 옷에 달린 단추의 수나 모양까지도 제한을 둔다고 한다. 아미쉬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아프면 이들이 직접 만든 전통약을 먹거나 동네 아미쉬 의사에게 간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아미쉬-


아미쉬는 8학년 이상의 교육은 거의 받지 않는데 이는 8학년까지만 다니면 아미쉬 삶을 영위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미쉬는 아미쉬끼리 결혼을 하는데 이 때문에 기형아가 태어나는 확률 또한 높다고 한다. 미국 내에 있는 20만 명의 아미쉬가 모두 18세기에 미국으로 건너온 단 200명으로부터 태어난 후손이기 때문에 그만큼 유전자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계속해서 집단 내 결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우리 생각에 젊은 아미쉬들은 이 생활을 싫어하고 도시로 떠나고 싶어할 것 같지만 아미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아미쉬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아미쉬 집단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데도 아미쉬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저속함에 찌들지 않은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나더러 이렇게 살라면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은 삶의 방식이었다.


저녁 식사가 모두 끝나자 원하는 사람은 빵이나 파이 혹은 아미쉬 스타일로 뜨개질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이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다보니 겨울에는 아무래도 생계 유지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소개하며 소량의 수입을 얻는다고 한다. 나는 맛있는 빵을 한 덩어리 샀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그저그런 빵도 3불이 넘는데 이건 2불 밖에 안하니 웬지 미안하기까지 했다. 마차가 즐비한 동네를 떠나 빵 한 덩어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니 잊어버리고 가지고 가지 않았던 사진기가 문 앞에 덜렁 놓여 있었다. 알고보니 아미쉬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진 찍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날이 풀리면 아미쉬 마을에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

Wednesday, February 20, 2008

Don't judge me!

*이 동네에서 제법 유명한 음식점 중 하나인 그린 보울(Green Bowl)에서 아냐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 음식점은 특히 백인들한테 인기가 많은데 나는 그저 그랬다. 샐러드바에서 원하는 야채를 고르고 그 옆에 있는 약 20가지 드레싱 중에 원하는 것을 뿌린 다음에 원하는 고기(소고기, 닭고기, 새우)를 고른 후 그것을 요리사 아저씨에게 넘기면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철판구이를 해 준다. 그런데 내가 양념 몇 스푼을 넣어야 맛이 나는지 혹은 간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먹어보지 않고야 어떻게 아느냐 이 말이다. 심지어는 다진 마늘도 고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만들어 본 적 없는 철판구이에 얼만큼 들어가야 맛이 날지 어떻게 아느냐 이 것이다. 원하는 재료로만 요리가 되어 나오니 크게 맛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간이 애매하게 덜 된 것이 웬지 2프로 부족했다. 자고로 음식을 잘 하는 식당이라면 요리사가 비밀의 레시피를 가지고 양념의 비율을 맞춰서 척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재료도 나더러 고르라 하고 양념도 내가 알아서 하라고 하니 이건 완전히 요리사의 책임 회피가 아닌가? 나는 아무래도 구닥다리인가보다.

*이 동네에서 내가 잘 가는 헌책방 겸 커피숍이 있다. 그곳에 가면 책장 사이사이에 소파도 있고 흔들의자도 있어서 아예 자리잡고 앉아 한참 이것저것 읽기에 딱 좋다. 인류학 책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어째 매번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 것일까. 오늘도 책을 네 권이나 샀다. 20불에 네 권. 게다가 하나같이 유명한 책들이니 사길 잘했지 싶다. 그나저나 읽기나 해야할텐데.

*요즘은 내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박사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S양은 원하던 좋은 학교에 교수직을 잡았고 역시 박사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P양은 아기를 가졌단다! K양은 무사히 첫 아이인 뽀야를 낳았고 Y언니도 무사히 둘째 딸인 상하를 낳았으며 H언니도 역시 무사히 둘째 딸 다연이를 낳았고 O언니는 첫 아들 윤재를 낳았다. 그야말로 경사났네 경사났어~모두모두 축하합니다! 그리고 모두모두 참말로 부럽습니다!! 나에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호호.

*두 번의 이혼과 불임진단. 이후에 정자기증을 받아 마흔 두살에 첫 아이를 낳은 허수경. 그녀의 선택을 두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처음부터 아빠 없는 아이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부터 이상한 아빠보다는 없는 아빠가 낫다는 생각까지. 내 생각에는 허수경 자신만큼 이 사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없을 것 같기에 그녀의 선택을 지지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남편은 없어도 되지만 아이에게 아빠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엄마 아빠가 함께 키우는 아이보다 제 아이를 더 잘 키울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짐을 아이에게 지워준 것이 너무나 미안하지요. 하지만 누구나 한 가지씩 가지고 있는 그런 결함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힘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요." 멋지다. 그래도 혼자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는 모습을 보니 쓸쓸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해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도 하고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자라는 아이도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 가정에서 자라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엉망진창으로 상처를 받고 자라는 아이도 있고 아예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도 있으며 신애라와 차인표의 아이들처럼 친부모 혹은 입양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도 있다. 어떻게 자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 가장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있기는 한 것일까. 겉으로 볼 때는 모자라 보여도 속내가 알찬 경우도 있고 겉으로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보여도 속내가 폭탄 맞은 집 같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인생의 목표 중 하나가 남편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 믿으며 그 사실을 남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남편도 그녀도 참 불행해 보인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 중 하나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 영어로 judge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이는 사전에 나오는 뜻 그대로 '판단하다'의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친구끼리 이야기할 때도 "I hope you don't judge me." 혹은 "Please promise you won't judge me."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데 이는 나의 말 또는 행동을 통해 '쟤는 저런저런 사람이구나' 하면서 네 기준으로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심각하게 "You are being judgmental."이라고 하면 대판 싸움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리라.

우리들의 가장 흔한 실수가 '나중에 이것이것을 꼭 고치도록 하고야 말겠어' 혹은 '지금은 안 좋아 보이지만 내가 어떻게든 노력하면 저걸 고칠 수 있을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자신더러 남의 일면을 고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고 한다면 그게 그리 쉽게 되겠는가. 내가 싫어하는 상대방의 어떤 면을 알게 된 상태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던지--이 둘 중 하나를 해야 현명한 것이지 내 마음에 들도록 그 사람을 바꾸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심하게 표현하면 오만이라는 것.

나는 어떠했는가.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면이 없었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물론 지금도 친구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고 가끔씩 참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남을 judge 할 때가 있다. (역시나 행동보다는 말이 백만배 쉽다!) 하지만 지난 일 년동안 스스로 가장 많이 한 연습이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 것이지 싶다. 하물며 핏줄을 나눈 가족도 서로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사는데 내 친구가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인가. 예전 같으면 누구는 저래서 맘에 안 들고 누구는 또 이래서 싫고 하는 생각들을 했을텐데 요즘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긴다. 나 역시 남들에게 완벽한 인간일 수 없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 역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인연이 진짜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Sunday, February 10, 2008

Feb.10, 2008

-어쩐지 수상했다. 어젯밤에 바람 소리가 너무도 커서 잠을 계속 깨우는 바람에 급기야는 귀 속에다 집어 넣는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고서야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는 우박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고 바람 소리에 잠을 깨고.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오늘은 최악의 날씨다. 어제 비록 눈이 왔지만 아침에 햇살이 쨍하길래 일요일이지만 학교에 나왔다. 내 책상은 창문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잠시 뒤돌아보니 창밖의 나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눈보라란 이런 것이군. 게다가 바람은 또 얼마나 부는지. 아무래도 학교는 방음이 집보다 잘 되나보다. 바깥에 시속 40킬로미터가 넘는 강풍이 불고 있다니 조금 후에 집에 바람을 타고 날아가야겠다. 바람 때문에 체감기온이 영하 20도가 넘게 내려간단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오늘 밤에는 최고 시속 87킬로미터의 강풍이 불 예정이라면서 "severe weather alert"이라고 깜빡깜빡 난리가 났다. 아무래도 오늘 밤도 귀마개를 하고 자야겠다.

-아침에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남대문이 불에 활활 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내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에 완전 무지하게 살고 있음을 감안해 엄마가 생중계를 해 준 것이다.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 가서 생중계를 보니 참말로 마음이 안 좋았다. 저렇게 오래된 건물이 순식간에 허무하게 그냥 휙 없어지고 있었다. 국보 1호가 허망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새삼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느꼈다.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미국은 특히 우리 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집들이 나무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불조심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는 눈보라가 펑펑. 저곳에서는 불길이 활활.

Saturday, February 9, 2008

Happy new year!


-한국에서도 "Chinese new year"가 큰 명절이라는 것을 안 니나 선생님께서 설날에 점심을 사 주셨다. (우리 랩 포닥인 홀리는 워싱턴 디씨에 가 있는 관계로 사진에 없다.) 사진 속에 보이는 네 명이서 이 동네 한국 음식점 <김치>에 갔다. 한국 음식은 처음이라는 니나 선생님과 테스(Tess)는 각각 야채 돌솥 비빔밥과 돌솥 비빔밥을 시켰다. 지난 번에 아냐는 처음으로 한국 음식을 먹어봤는데 나보다도 더 맛있게 먹었다. 나는 설날을 맞이하여 떡만두국을 시켰다. 채식주의자인 니나 선생님은 아쉽게도 떡만두국 맛을 보지 못하셨으나 테스와 아냐는 내가 조금씩 덜어준 국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막상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떡도 그녀들은 참말로 좋아했다. 아냐는 오뎅볶음의 맛에 푹 빠져버려서 급기야 어제 아시안 마켓에 가서 오뎅을 샀다.

나더러 Happy new year! 하고 말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학생들과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선생님이 돈을 낸다는 철학을 가지고 계시는 니나 선생님께도 또 한 번 감사드렸다. 점심 먹고 연구실 돌아와서 다 같이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참고로 저 목도리는 우리 엄마가 정성스레 떠서 보내주신 예쁜 목도리다! 아차. 지난 주에 머리를 싹둑 잘랐다. 역시 짧은 머리가 편해요~

-어제는 금요일이라는 핑계로 저녁 때 아냐랑 둘이 이 동네 하나 뿐인 몰을 휘젓고 다니며 놀았다. 원래는 벨트 하나 사려고 간 것인데 돌아올 때는 쇼핑백 한 무더기를 안고 나왔다. 그냥 집에 가기 아쉽다는 핑계로 맥주 딱 한 잔 하러 간 것인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둘 다 헤롱헤롱 상태였다. 덕분에 오늘은 하루 종일 속이 울렁울렁 머리가 지끈지끈. 정말이지 다시는 빈 속에 술을 마시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그래도 나랑 나이도 같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친구가 있어서 즐거운 저녁이었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오늘은 하루 종일 빈둥대고 있다. 이것도 나름대로 좋네.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이것만 해도 이렇게 시간이 잘 가니 말이다!

Friday, February 1, 2008

My favorites

-썰렁한 홈피에 들어올 때마다 귀여운 나의 조카 서연이 사진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 조카가 제일로 예쁘듯이 나도 우리 서연이가 제일로 예쁘고 귀엽다. 서연이가 처음 걷던 때, 서연이가 말을 처음 시작했을 때, 서연이랑 처음으로 대화가 된다고 느꼈을 때--이 모든 때가 생생한데 이제 곧 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 서연이가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서 예선 참가자 1만 명을 뚫고 본선 출전자 178명을 또 다시 뚫고 초등학생을 통틀어 대상을 받았단다. 대강당에서 수백명이 앉아서 지켜보는데도 떨지도 않는 신기한 아이. 장학금도 제법 큰 액수를 받아왔다니 참말로 신통방통할 일이다. 아이들이 영어를 잘해도 도토리 키재기겠지 했는데 작년에 서울 가서 서연이에게 영어를 시켜보니 얼마나 잘하는지 놀라웠다. 아무튼 자랑스런 최서연 양이 국민일보에도 실리고 급기야는 우먼센스 잡지에도 나왔단다. 위의 사진은 국민일보에서 가져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날의 할 일들을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기억을 착착 해 내곤 했는데 이제는 할일이 지나치게 많아지기도 했고 머리가 나빠진 것 같기도 하고 해서...조금 후에 해야 하는 일조차도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거 원.

-나같이 연구기금이 넉넉치 않은 학문 분야에 종사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얼마나 연구비를 잘 따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훗날 직업을 찾을 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조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연구비를 타는 것이 대학원생 때부터 중요하다. 내 비록 아직 주요 출판 논문은 없지만 지금까지 연구비 받아내기에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특히 얼마 전에는 그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우리 팀의 산동성 연구를 지원해 주겠노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기쁨도 따라주었다. 운이 좋아 멋진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도 실어준단다.

며칠 전에 또 하나의 연구기금을 신청했다. 부디 이번 연구비도 나에게 오는 행운이 따라 줬으면 좋겠다. 어제는 3월 중순이 마감인 또 하나의 연구기금을 발견했다. 이것도 한번 지원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정신이 없다. 예전에는 연구비 신청하는 게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이것도 조금씩 재밌어지고 있다. 단지 돈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왜 내 연구가 중요한지, 왜 나에게 돈을 줘야 하는지에 대해 쓰는 것이다 보니 마치 내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구비 혹은 장학금이 나에게 돌아올 때의 기분은 정말 좋다.

-연구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것이다. 그동안은 연구 성과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을 낼래야 낼 수가 없었는데 이제 서서히 자료가 모이면서 논문을 쓸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저널에 논문을 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런 논문은 사실 쓰나마나이다. 논문을 싣기가 얼마나 까다로운가에 따라서 학술지의 수준이 결정된다. 일단 논문을 쓴 후에 원하는 학술지에 보내면 그 학술잡지의 편집자들이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서너 명에게 접수된 논문을 보낸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원고를 읽어보고 과연 출판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져서 편집자에게 돌려 보낸다. 이 과정은 거의 대부분 익명으로 진행되는데 이를 피어 리뷰(peer review)라고 부른다. 이 과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피어 리뷰를 통과하면 학술지에 내 논문이 실리는 것이고 통과를 못하면 아쉽게도 탈락! 그리하여 피어 리뷰가 없는 학술지에는 논문을 내나 마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나의 학문 이력서에는 "피어 리뷰 저널에 실린 논문"이라고 해서 적어야 한다. 내가 만든 저널에 내가 논문을 싣고 그것을 마치 중요한 업적인 냥 주루룩 나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황우석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이 그리 큰 파장을 불러왔던 것도 그것이 피어 리뷰 과정조차 보란 듯이 통과하고 저널에 실렸기 때문이다.

올해 나의 목표는 피어 리뷰 저널에 논문을 최소한 두 개 내는 것이다. 어찌어찌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우리 학계에서 가장 좋은 저널이라고 불리는 저널 두 군데에 논문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피어 리뷰가 황당하게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그리하여 할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경쟁심리와 성취감 같은 것들이 묘하게 교차하면서 해 볼만 하다는 의욕이 생긴다.

-요즘은 하루종일 인류학과 고고학만 생각하고 산다.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거야!

Thursday, January 17, 2008

My mentors

니나 선생님이 스탠포드에서 펜스테잇 인류학과장으로 옮기신 지 이제 삼년째이다. 얼마 전에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펜스테잇으로 옮긴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학과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한 해가 끝날 때면 니나 선생님은 인류학과 교수님들을 한 사람씩 개인 인터뷰를 하며 지난 한 해의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이 때 앨런 워커 선생님을 '평가'해야 했던 날이 가장 이상한 기억 중 하나라고 했다.

신문에서 툭하면 '세계적인 학자 ***교수'라는 말을 잘 쓰는데 솔직히 기가 막힐 때가 있다. 한국 내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학자가 단지 기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갑자기 세계적인 학자로 둔갑할 때 정말 기가 막힌다. 세계적인 학자라는 말은 앨런 워커 선생님께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 앨런 워커 선생님을 '평가'해야 했던 니나 선생님의 이야기가 재미났다. 인터뷰 전에 니나 선생님은 앨런 워커 선생님에게 "이렇게 평가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 정말 이상하군요."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앨런 워커 선생님의 아내인 팻 쉽만 선생님이 나의 실질적인 논문 지도교수이다. 팻 쉽만 선생님은 예전 네이버 블로그에도 한 번 소개했지만 내가 하는 분야의 선구자 중 한 분이다. 그런 분께 일대일 지도를 받는 것도 영광인데 짬짬이 남편으로서 앨런 워커 선생님에 대해 듣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다.

하루는 앨런 워커 선생님이 DVD 플레이어가 달린 커피 포트를 사 오셨다고 한다. 이걸 보고 아내인 팻 선생님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아니 도대체 커피 포트에 웬 DVD가 필요하냐고. 집에 멀쩡하게 TV도 있고 DVD 플레이어도 있는데 이걸 왜 샀냐고. 이런 건 누가 사나 했더니 당신이 샀냐고. 그랬더니 남편인 앨런 워커 선생님은 머뭇머뭇 거리시더니 그냥 멋져 보여서 샀다고 하셨단다.

한 번은 두 분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길이어서 앨런 워커 선생님의 차를 타고 갔다. 선생님의 자동차는 현대 XG 2000년 모델이었다. 앨런 워커 선생님의 자동차 자랑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XG가 엔진도 강하고 승차감 좋고 블라블라블라. 얼마나 만족해 하시는지 갑자기 내가 현대자동차 주인도 아니면서 한국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뿌듯해졌다. 그렇게 식당 근처에 도착해 주차장에 들어섰는데 두 분이 계속 주차를 여기다 하자 저기다 하자를 놓고 옥신각신.

앨런 워커 선생님은 영국인이다. 영국 영어의 우아한 억양을 가지고 계신데 그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몇 십 년 전 어디어디를 갔을 때의 이야기를 줄줄 하기 시작하시면 넋을 놓고 듣게 된다. 이날 점심 때 들은 웃긴 이야기 하나. 선생님이 십년 쯤 전에 타지키스탄인가 그 쪽으로 발굴 조사를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그 동네 작은 공항에서 밤을 새고 다음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놀랍게도 그 공항에는 영국 항공사의 VIP 라운지가 있었고 선생님은 잘 됐다 싶어 그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고 불도 켜져 있지 않아서 다시 나오려는 찰나.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을 감지한 웨이터가 나타나 컴컴한 라운지의 소파 쪽으로 선생님을 안내했다. 선생님은 여기 앉아서 자면 되겠군 생각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빙글빙글 도는 오색 조명이 켜지면서 배꼽춤 의상의 여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선생님을 감싸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브리티쉬 에어라인의 VIP 라운지라 해서 들어왔더니 이게 웬 디스코텍. 아니라고 나 잠 자러 왔다고 하자 그녀들은 선생님을 의아한 눈으로 보더니 감쪽같이 다시 사라졌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팻 선생님과 선생님 댁에서 미팅을 했다. 몇 번 가 본 집이지만 갈 때마다 참 좋다고 느낀다. 두 분이 각각 커다란 서재가 따로 있고 귀엽게 생긴 고양이 두 마리가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사셨다는 커다란 그림들이 집을 장식하고 있다. 앨런 선생님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 한 명 있고 팻 선생님과는 아이가 없다. 벌써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두 분은 함께 아프리카에서 발굴을 하며 펜스테잇에서 가르치며 논문도 같이 내고 책도 같이 쓰며 보내고 있다. 참으로 부러운 부부이고 이 두 분과 가까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Saturday, January 5, 2008

Clean clean clean

*새해를 맞이하여 그간 미루어 오던 일을 한 가지 했다. 이름하여 우리 집 블라인드 닦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처음부터 창문에 달려있는 블라인드가 있는데 이게 어느날 만져 보니 꽤나 더러운 것이었다. 먼지가 소복하게 앉아있길래 닦아야지 닦아야지 하면서도 피일차일 미루어왔다. 세상에나. 블라인드 하나의 너비가 워낙 작아서 촘촘하니 창문 가득 블라인드 살이 붙어 있는데 그거 하나씩 걸레로 다 닦아 주다가 정말이지 폭발할 뻔했다. 걸레를 집게처럼 잡고 살의 양쪽을 쓱싹 닦아주는데 살이 수십 개는 되다 보니 이것을 끝내는데 상당한 정신 수양이 필요했다. 덕분에 지금은 뽀독뽀독하게 되었지만 나중에 내게 집이 생기면 창문에 이런 촘촘한 블라인드는 절대 달지 않으리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블라인드의 먼지도 몰랐으면 편했을테고 집안 구석구석의 먼지도 몰랐으면 편했을게다. 방학과 새해를 맞이하여 온 집을 한 번 뒤집어 주고 걸레로 마구 닦아줬다. 이 놈의 먼지는 공공의 적이다. 닦아도 닦아도 며칠 있으면 또 생기고. 걸레질을 하다가 '혹시 저기도 먼지가?' 하는 마음으로 그간 닦아보지 않았던 곳을 쓱 문지르면 백발백중 먼지가 싹 하고 묻어난다. 윽. 모르는 게 약인데.

*내가 사는 아파트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해가 질 때면 햇살이 넘치도록 들어온다. 이 때가 바로 먼지가 눈 앞에 나타나는 최고의 시간대이다. 이 때는 되도록 집에 있지 말거나 있다면 블라인드를 다 닫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청소의 원칙. 모르는 게 약이다.

*갑자기 또 여기저기 마구 널려있는 종이 쪼가리들과 기타 등등 작은 물건들이 왜 이리 거슬리기 시작하는지. 일단 가능한한 모든 것을 서랍에 박아 버리고 침대 밑에 밀어 넣어 버렸다. 하지만 논문을 쓰다보면 또 종이들이 튀어나오고 연필이 사방에 흩어져 있고 물컵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한 번씩 싹 청소를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셈 치고 있다. 청소기는 무거운 물건이다 보니 집 한 구석에 내 놓았는데 이 것도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꺼냈다 넣었다 하기 번거로워서 청소기를 안 돌리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두었는데 말이다.

*빨래에 또 왜 이리 열을 올리는지. 미국 살다보면 동전 세탁기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이 아파트의 세탁기는 세탁력이 영 별로다. 옥시크린 선전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 같은 반짝반짝은 커녕 그저 그렇다. 세제 때문인가 했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배운 무엇이든 손으로 빨기 정신을 되새기며 이것저것 기분 내킬 때마다 세탁 비누로 깨끗하게 빨곤하는 버릇도 새로 생겼다.

*내가 집안에서 최고로 자신 있는 곳은 바로 부엌이다. 윤이 번쩍번쩍 까지는 아니더라도 깨끗한 부엌을 보면 기분이 좋다. 음식은 열심히 해 먹으면서 그 음식을 하는 부엌은 더러운 것은 참기가 힘들다. 멋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알고보니 그 부엌이 더럽다면 기분이 찝찝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일 열심히 닦는 곳이 부엌이다.

*엄마와 이모들은 집을 정말 깨끗하게 해 두신다. 불시에 들이닥쳐도 옥의 티도 없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나도 자연스레 거기에 익숙해졌나.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엄마나 이모들의 살림 솜씨에 대면 새발의 피요 고목나무의 매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깔끔한 집은 인간미가 안 풍긴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 집이 인간미가 넘치면 넘쳤지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집 치울 시간에 다른 것을 하겠다고도 하는데 일단 버릇이 되면 집 치우는 것은 생각만큼 시간을 잡아 먹지 않는다. 사람마다 취미와 성격이 다르니 남이야 어떻게 해 놓고 살든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 집이 난장판이면 괜히 기분도 난장판이 된다. 거꾸로 깨끗하고 깔끔하게 잘 정돈 된 집에 있으면 덩달아 내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것에 중독되어 오늘도 난 계속 쓸고 닦는다.

*다 쓰고 보니 꼭 청소에 미친 정신병자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워낙 이곳에서 할 일이 딱히 없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 돌이켜보니 캘리포니아 살 때는 너무 귀찮아서 걸레 한 번 잡아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청소의 원칙 또 하나.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아니하다." 이는 유홍준의 말처럼 비단 문화유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청소의 세계에 입문하면 도저히 뒷걸음쳐 나올 수 없다. 어디어디에 먼지가 쌓인다는 사실을 한 번 알게 되면 그 다음에 그곳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웬만해서는 새로운 곳을 닦아보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혹시나 하고 닦아 봤는데 놀랍게도 먼지가 없네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참으로 희박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소 이야기는 여기서 끝!

Tuesday, January 1, 2008

The first day of 2008

*즐거워도 슬퍼도 행복해도 괴로워도 시간은 언제나 잘 간다. 벌써 2007년이 과거가 되었다. 지난 몇 년 간은 어떻게 산 건지 도대체 2007년 내내 '올해가 2006년인가 2007년인가' 하고 헷갈리는 바람에 항상 달력을 들고 다녔다. 좀 이상할 정도로 2007년은 마치 내게 존재하지 않는 해 같았다. 지금도 여기 쓰면서 순간 2006년인가 하고 생각이 들 정도니...왜 이러지?

*올해는 여느 때보다 조용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다. 학기가 끝난 후의 조용함을 틈타 드디어 책 원고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출판사 측에서 일러스트레이션도 끝냈기에 이제는 출판되는 일만 남았다. 학기 중에는 이것저것 아무래도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진득하게 논문이나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 기간 동안 열심히 하고 있다.

*요즘은 슬슬 다시 요리에 발동이 걸리고 있다. 그대신 요리하고 나서 사진찍기에는 관심이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귀찮은게야. 흐흐.

-고기 국물을 하루 전에 진하게 낸 후에 고기를 쪽쪽 찢어서 맛나게 양념해 주고 만두와 함께 퐁당퐁당 넣으면 만두국 완성. 지단을 부쳐볼까 하다가 혼자서 지단까지 얹어 먹는 것은 약간의 싸이코 기질이 보이는 행동이라고 결론을 내려 그냥 계란을 하나 휘리릭 풀어줬다. 내가 끓였지만 맛있었다.

-지난 학기 최고의 애용식, 파스타 샐러드. 삼색 파스타를 사서 강낭콩, 삼색 피망, 보라색 양파와 버물버물 해 준다. 파스타가 질리면 똑같은 야채에다가 (그때그때 냉장고에 남은 야채 추가) 뜨거운 밥을 넣고 치즈를 뿌려준다. 그러면 마치 도리아 같은 밥 요리가 된다. 피망이나 양파 같은 것들은 비교적 오래 가기 때문에 한꺼번에 왕창 썰어놓고 이래저래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오믈렛이 먹고 싶은 아침에는 이 재료들에 달걀과 우유만 섞어주면 되니 이래저래 요즘은 피망의 여왕이 되었다. 빨간색이나 주황색 노랑색 피망은 녹색 피망의 두 배 가격인 것이 단점이다.

-피망이 남았다--할 경우에는 stuffed pepper를 만들어봐도 좋다. 피망을 윗꼭지 부분만 떼어내고 안 쪽의 씨를 잘 제거해 주고 깨끗이 비운다. 이 때 초보의 경우 피망을 다 부수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기 쉬우니 조심할 것. 참고로 난 아직도 초보여서 맨날 절반은 우두둑 찢어진다. 간 쇠고기에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야채를 송송 썰어서 다 섞어준다. 소금 후추 베이즐 등등을 막 뿌려준다. 밥이 남았으면 밥도 섞어도 괜찮다. 아무 것도 없으면 소고기에 양파만 넣어도 괜찮다. 암튼 무엇이 되었든 간에 준비된 속을 피망 속에 쑤셔 넣는다. 이 때 초보의 경우 또 피망을 찢는 우를 범하기 쉬우니 조심할 것. 이렇게 가득 채운 피망을 오븐에 넣어도 되고 찜통에 넣고 쪄도 된다. 단, 찜통에 넣을 경우 아차 하는 시간을 넘기게 되면 녹색 피망이 흐물흐물해 지면 색이 흐리멍텅하게 변해버리니 그 순간을 잘 포착할 것.

-Y언니의 홈피에서 간단 티라미수 레시피를 보고 아주 오랜만에 밥이 아닌 것을 만들어 보았다. 레이디 핑거라는 이태리식 작은 빵을 커피에 살짝 적신 후 티라미수 반죽(이태리 크림치즈+설탕+생크림)과 번갈아 가며 쌓아준다. 냉장고에 몇 시간 넣어둔 후 먹기 직전에 설탕 안 들어간 코코아 가루를 솔솔 뿌려준다. 언니 말대로 초간단 초맛있음 이었다. 문제는 너무 많이 만들어서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날도 먹어야 했다는 것.

*아래 글을 보신 우리 엄마 왈. "얘, 우산 말고 다른 것들도 같이 줬는데 우산만 기억하니!" 흠. 우산 밖에 기억이 안 나는 걸 어쩝니까! ㅎㅎ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조금 전에 읽었다. 섬뜩하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하고 너무 사실적이기도 한 특이한 중편 소설이었다. 재미난 것은 문학상을 받은 사람들의 수상소감에는 늘 비슷한 분위기가 흐른다는 것이다. 마치 연기대상 수상자들이 늘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신 *** 감독님, *** 작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문학상 수상소감에도 그런 패턴이 있더라. 그들의 시작은 언제나 난해하고 비유적이다. 마지막 한 문단에 가서 아주 짧으면서도 난해한 느낌을 주는 말들로 **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박사 논문 앞에 들어가는 서문도 마찬가지다. 읽어보면 그 특유의 공통점이 있다. 아직 박사 논문 한 줄도 안 썼는데 난 벌써 감사의 말을 어떻게 쓸까하는 고민을 하곤 한다.

*2008년이다. 올 한 해의 소망은 딱 한 가지이다. 박사 논문을 완전히 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 끝내자! 여러 분의 새해 소망은 무엇인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