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30, 2008

Last day of April 08

*드디어 이번 학기 중국어 마지막 시험을 끝냈다. Advanced Chinese였는지라 배우는 것들의 수준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다른 공부와는 또 다른 류의 고통이 아니던가. 매일 반복하는 것 이외에는 그야말로 왕도가 없는 언어 익히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선생님은 학생들을 달달달 볶았다. 그게 최고의 방법이니 선생님을 탓할 일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많은 시험과 숙제를 채점해 준 선생님에게 고마울 뿐. 약 50번의 수업 중 퀴즈가 16개, 큰 시험이 4개, 구두 시험이 2개, 짧은 수필 30개 쓰기, 책 숙제 4개, 그룹 발표 1번, 그리고 토론하기 4 번.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번 학기에 친구들이 나더러 "뭐해"라고 물으면 내 대답이 거의 틀림없이 "내일 중국어 시험 볼 것 공부해"였다. 어쨌든 고생이 약간의 빛을 발해 넉 달 전보다 중국어 실력이 팍 늘었다. 이제 시험은 다 끝났고 마지막으로 수필 10개만(!!) 더 쓰면 된다. 내일까지 다 해서 내야지.

5월 중순부터 중국에서 약 석 달을 머무를 예정인데 부디 중국어 실력이 팍팍 늘길 바래본다. 그나저나 북경 올림픽 때문에 서울에서 치고 받고 난리가 났었나본데 중국은 희한한 나라다. 티벳의 독립 문제는 이것저것 많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안이다 보니 나이브하게 "티벳을 독립시켜라!"만이 대수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치고 받다니 기가 막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한번 치고 받아주고 아르헨티나는 철통 경비 속에 또 비난 여론 속에 무사히 넘어가더니 한국에서는 다시 치고 받고. 내 중국 친구들은 메신저 이름들을 몽땅 "하트모양 China"로 바꾸고.

그 와중에 달라이 라마가 얼마 전에 시애틀 왔을 때 인터뷰를 들은 나는 참말로 실망하고. 워낙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진 까닭에 내가 지나친 기대를 했던 것일까. 솔직히 객관적으로 그의 인터뷰는 전혀 정신적 지도자의 인터뷰 같지 않았다. 티벳에서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이 엄청난 것이 기정 사실인데도 완전히 남의 집 불구경하듯 말하는 태도가 나에게는 무책임하게 보였다. 왜냐.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게 아닌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겉으로 말을 그리 하며 나 몰라라 나는 아무 영향력이 없어요만 강조하는 게 무책임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제는 오랜만에 된장에 무친 나물이 먹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시금치 한 단을 사다가 살짝 데친 후 나물을 만들었다. 뭘 섞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대충 양념을 만들었다. 엄마가 보내준 막장과 들기름 (들기름도 소포로 보내는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하다!!), 간장 약간 그리고 다진 마늘을 넣고 마지막에 깨소금을 뿌려 마무리. 깊은 맛 내지는 내가 기대하던 그런 맛은 아니었지만 봄맞이 나물로 꽤 괜찮았다. 냠냠.

<오늘 저녁 메뉴>

-검은 쌀을 섞은 밥: 검은 쌀도 엄마가 얼마 전에 한 줌 보내주심

-그저께 만든 닭수프: 감기 기운이 있어서 미국애들 방법을 또 다시 따라해 봄. 당근과 샐러리, 레몬즙, 다진 마늘과 소금, 후추. 정말 효과가 있는 것 같음. 미국표 닭죽이라고나 할까.

-오이지와 깻잎: 이것도 엄마가 얼마 전에 공수. 내 평생 우리 엄마표 오이지보다 맛있는 오이지는 먹어본 적이 없다. 서울 가면 꼭 배우고 말테야.

-김: 이것도 엄마가 보내주심. 김 이름이 무진장 긴데 생각이 안난다. 현미유로 구워서 바삭바삭 맛있는 김? 뭐 이런 거다. 요즘은 이름들이 희한하게 긴 게 많은 것 같다. 김과 깻잎을 같이 먹는 게 좀 이상한가. 뭐 어때. 맛있는데.

-파만 넣은 계란말이: 파는 한번 사서 왕창 다져 얼려놓기 때문에 파만 넣은 계란말이는 내가 가장 즐겨 먹는 반찬 중 하나. 이보다 쉬운 것이 또 있을까. 물론 돌돌 말다가 실패해서 열받아서 휙휙 마구 저어 스크램블을 만들어 버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ㅎㅎ

-어제 만든 시금치 된장무침

이 정도면 훌륭한 저녁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저녁에는 아냐네 집에 가서 카레를 만들기 시범을 보였다. 내가 지난 학기에 카레를 만들어 그녀를 초대했는데 한국식 내지는 일본식 카레를 처음 먹어본 아냐가 맛있다고 자기도 카레 블럭을 샀다. 그런데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아냐는 처음 시도해 보는 음식에 자신이 없다고 해 나를 특별 초빙했다. 으흐흐. 카레만큼 쉬운 음식이 어디 있나. 당근, 양파, 감자, 버섯, 샐러리, 닭가슴살 모두 오목오목 썰어주고 닭가슴살과 양파 먼저 버터 넣어 달달 볶은 후 나머지 다 넣고 볶다가 물 자작하게 붓고 뚜껑 덮고 15분 가량 기다린 후에 불 끄고 카레 넣어 녹여준 후 다시 조금 기다리면 끝!

다 써놓고 보니, 오늘이 시험인데 나는 어제 시금치 사다가 나물 만들고 아냐네 집에 가서 카레도 만들고. 완전 여유 만땅을 부리는 것을 보니 시험의 고수가 되었나보다!

Friday, April 25, 2008

Spring 08 Photos

--지금 막 시험 하나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짬을 내 사진을 정리 중--


아름다운 도시 밴쿠버.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이 위치한 곳에서 바라보는 밴쿠버의 경치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몇 년 전에 친구 가영이가 이곳을 구경시켜 주었었는데 다시 가 보아도 그때 그 감동이 그대로였다. 빅토리아 대학 인류학과 교수인 터키 친구 휼리아와 함께 다른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 예전예전에 M양과 미친듯이 쇼핑센터를 누비다가 발견한 빨간 손가방. 사람들이 어찌나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던지. 빈말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M양, 그대도 어여 하나 장만해!


니나 선생님의 비서로 일하는 테스. 내 바로 옆에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매일 보는 테스. 그녀가 없었다면 얼마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단조롭고 따분했을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그녀. 지난 금요일에 테스 부부와 함께 이 동네에 있는 테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저 뒷쪽에 보이는 푸르른 초원이 그 친구네 정원. 지질학자인 테스 친구는 취미로 조각을 만들고 도자기를 굽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집에 아예 화로까지 있고 지질학자의 지식을 동원해 이곳저곳으로 도자기 만드는 데 쓸 점토를 캐러 다닌다고 한다. 이 집 화장실에 갔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화장실에 떡하니 이구아나 한 마리가 있는 게 아닌가. 이구아나가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고. 변기 바로 앞에 버티고 있는데 정말이지 가슴 졸였다. 애완동물 '이키'란다.


긴머리는 도저히 내 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또 머리를 싹뚝 잘랐다. 층을 내면 모양이 나긴 하지만 조금만 길면 도무지 관리 불가 지저분 극치. 깔끔하게 잘라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몽실언니 내지는 양송이 버섯 같이 만들어주었다. 뭐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머리가 아닌가 싶다.

우리 연구실 포닥인 홀리가 결혼을 했다.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상당히 정형화된 데 비해 미국 결혼식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이번에는 100명 정도 하객이 모인 작은 야외 결혼식이었다. 음악 없이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신부 입장할 때는 홀리가 흥얼흥얼 "딴딴따다" 하면서 들어왔다.

이날 주례는 우리 과 대학원생인 제이슨이 맡았다. 제이슨은 홀리와 케빈의 친한 친구여서 발탁. 서로에게 편지를 쓰게 한 다음에 그걸 제이슨이 읽었다. 케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홀리 엄마와 친구가 직접 쓴 시를 한 편씩 읽고 그렇게 간소한 결혼식이 끝났다. 통째로 빌린 산 속의 산장에서 진행된 결혼식. 12시가 넘을 때까지 먹고 마시고 춤추고. 신나게 놀았다.

Tuesday, April 22, 2008

Bipolar

학기말이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미친듯이 바쁘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기절해 버릴 지도 모른다. 윽.

미국 오니 유난히 주변에 각종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정신과 상담 받는 것을 꺼려하지 않다보니 그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 숫자가 많아서이지 싶다. 복도 건너편에 있는 모 교수님은 심각한 바이폴라(bipolar) 증상으로 유명하다. 아마 우리말로 조울증이지 싶은데 본인도 괴롭겠지만 그 선생님과 어쩔 수 없이 의논할 것이 생기면 정말 골치가 아프다. 어제 무슨 일 때문에 그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하필이면 선생님 기분이 완전 바닥이었다. 다른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간 것이었기에 나는 단순한 전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나한테 아니 나를 향해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바람에 기분이 팍 상했다.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두둥. 바로 그 모 교수님이 나타나셨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한테 갑자기 한국어와 중국어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한글과 히라가나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기타 등등 질문을 하러 오셨다. 오늘은 또 기분이 완전 하늘을 날고 계신다. 조울증은 그렇다치고 워낙 아는 게 많은 선생님이어서 기분이 하늘을 날 때 대화를 하면 정말 재밌다.

꽤 심각한 조울증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내 주변에 몇 명 더 있다. 주의할 점. 그 사람 기분 안 좋을 때 나한테 성질 낸다고 맘 상하지 말 것. 그냥 기분이 나쁜가보다 하고 지나갈 것. 문제는 나도 사람인지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기분에 따라 나까지 오르락 내리락 했다가는 나까지 바이폴라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조심할 것.

Thursday, April 10, 2008

Biblical Archaeology


-펜실베니아가 본의 아니게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확정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면서 요즘은 매일 같이 라디오며 텔레비젼에 오바마와 힐러리 광고가 방송되고 있다. 오늘은 힐러리의 딸 첼시 클린턴이 캠퍼스를 방문해 연설을 한다고 한다. 학교 잔디밭에서 한다고 하니 조금 있다가 집에 가는 길에 슬쩍 봐야지. 사진은 힐러리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활짝 웃고 있는 여자 아이가 힐러리. 사진 속의 남동생과 아버지 모두 펜스테이트 졸업생이란다. 어린 시절의 일부를 펜실베니아에서 보냈다는 힐러리. 오바마가 아무래도 대통령 후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하지만 펜실베니아 사람들이 힐러리에게 얼만큼의 지지를 보내줄 지 궁금하다.

-지난 주말에 우리 랩 포닥인 홀리의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에 다녀왔다. 요즘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파티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 가 봤다. 결혼을 앞둔 신부의 여자 친구들이 신부와 먹고 놀며 결혼을 축하해주는 자리인 브라이덜 샤워. 결혼 선물 외에 브라이덜 샤워 선물도 사 가는 게 관례라고 한다. 포도주와 스낵을 곁들이면서 선물을 하나씩 풀어보고 함께 웃고 떠드느라 몇 시간이 흘렀다. 제일 웃긴 선물은 바로 속옷. 속옷 자체로는 웃길 게 없지만 친구들이 속옷 엉덩이 부분에다가 홀리 남편될 케빈의 사진을 집어 넣은 것! 다같이 친한 친구들이어서 그동안 찍어둔 사진 중에서 웃긴 것들로 골라 자그마치 일곱 장의 속옷에 모두 케빈의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선물 다 풀어보고 애비(우리 말로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좀 이상한데, Abby가 Abby의 이름이니...애비라고 하는 수 밖에!)가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저민 생강을 곁들인 햄구이, 감자 샐러드, 샐러드 그리고 아스파라거스. 후식으로는 정말 맛있는 라스베리 파이가 나왔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하니 여자 15명이 모인 자리는 어떠했겠는가. 다들 목청이 터져라 떠드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서도 귀가 윙윙거렸다. 오랜 만에 마음껏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번 주 내내 뼈다귀 랩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번 주의 과제는 염소와 양의 뼈다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염소와 양이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 뼈다귀의 구조가 놀랍게도 똑같다. 그래서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되는 염소와 양은 구별이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해 보는 것이 학자들 아니던가. 지난 100년 간 여러 명의 학자들이 이 문제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허나 염소와 양은 여전히 골치거리이다.


염소와 양이 널리 퍼져 있던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특히 염소와 양을 구별해 내는 것이 중요할 때가 많다. 이번 학기 프로젝트로 분석하고 있는 뼈다귀는 이스라엘의 텔 단(Tel Dan. Tel은 많은 지명이 붙여지는 단어로 언덕을 의미한다)이라는 곳의 신전에서 발견된 것들로 기원전 8세기 경에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 뼈다귀들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은 성경이라는 문서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분석하는 게 재미나다. 텔단 유적은 성경 여러 곳에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된다.

창세기 14장 14절.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포로로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 집에서 낳아 훈련받은 사람 318명을 거느리고 까지 쫓아갔습니다.

여호수아 19장 47절.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이라 하였더라"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구절은 바로 금송아지 부분이다.

열왕기상 12장 26-33절.
"여로보암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갈 것 같다. 이 백성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의 주인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왕은 조언을 구한 뒤에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너희에게 큰일이다. 이스라엘아, 여기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너희 신들이 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에 두었습니다. 이 일은 죄가 됐습니다. 백성들은 멀리 에까지 가서 그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텔단 유적에서 금송아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윗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돌에 새겨진 문서가 나왔고 이번 학기에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동물 뼈다귀들이 수천 개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특히 양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양의 뼈다귀들의 상당수에 당시 제사장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칼자국이 나 있다. 양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도살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자국들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문서이니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 게 당연하고 거기서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니 동물 뼈다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데 그래도 웬지 신기하고 재미나고 그렇다.

Tuesday, April 1, 2008

Long time no see


-요즘은 눈썹이 휘날리게 바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을 하고 있다.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인터넷 서핑할 시간조차 나지 않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5월달에 서울 거쳐 중국으로 간다. 이번이 마지막 논문 자료 수집이라고 각오하고 가는 것이기에 아주 사소한 것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를 해야 한다. 막상 가서 '어라. 이걸 생각 못 했네' 이러면 아주 곤란하니까. 사소하게는 뼉다귀에 번호를 적기에 가장 적합한 펜부터 시작해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만들고 있는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램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컴퓨터로 워드 문서 만들고 엑셀 통계 돌리고 포토샵 작업 하고 파워포인트 만드는 것을 주로 했지 데이터 베이스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집하는 자료가 방대하게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데이터 베이스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과감히 뛰어들어보기로 했다. 까짓거 만들어보자. 끄응. 눈이 토끼눈이 될 때까지 컴퓨터를 붙들고 앉아서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면서 애꿎은 컴퓨터를 두들겨 부셔 버리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였던가. 드디어 데이터 베이스를 대충 완성했다. 마이크로 소프트 액세스라는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엑셀의 단점을 놀라울만큼 완벽하게 보충했으며 그 자체로도 상당히 훌륭한 통계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원하는대로 만들 줄 몰라 너무 속상했는데 이제는 가지고 있는 옷이나 신발도 데이터 베이스 만들어 저장할까 하는 황당한 생각마저 해 본다.

-밴쿠버에서 열린 학회에 잘 다녀왔다. 마침 밴쿠버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도 다녀왔고. 학회에서 심포지엄 끝나고 교수님들이 막 나한테 와서 자기 소개를 하며 악수를 청하는 게 기분이 제일로 좋았다. 내가 늘 먼저 나를 소개하고 악수했지 이런 적은 없었기에. 이번에 학회에서 발표한 것을 꽤 좋은 저널에 출판하기로 했다. 으흐흐. 남은 기한 한 달. 윽. 아직 서론도 시작 안 했는데.

-니나 선생님이 몇 가지 일을 부탁하셔서 그것하느라, 중국어 공부 하느라, 새로 산 접사렌즈로 사진 찍는 연습하느라 기타 등등.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새로 생긴 버릇이 있다. 쉬고 싶을 때 예전에는 음악을 들었는데 이제는 그냥 아무 소리 안 나는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는다. 머리 속을 텅 비워보려고 노력을 한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어느날 공중 부양하고 도사되는 거 아닌가.

-머리도 식힐 겸 어제는 아이작 펄만 콘서트에 다녀왔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아이작 펄만과 단짝을 이루어 함께 다닌다는 로한 데 실바라는 스리랑카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함께 왔다. 둘다 쥴리어드 음대 교수이다. 아이작 펄만은 전동 스쿠터 같은 것을 타고 나와 거기에 앉아서 연주를 했다. 바흐 한 곡 하고 현대 음악 두 곡 하고. 마지막 곡은 여러 개의 짧은 곡들을 아이작 펄만이 직접 소개해 주고 연주했다. 어찌나 유머 감각이 뛰어난지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계속 웃었다. 노장의 땀방울을 가까이서 보고 말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가고 그나마 한 개 남은 자리 겨우 구해서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천장에 가까운 곳에서 연주를 감상했다. 다음 주에는 에비타 뮤지컬이 온다. 바빠서 갈까 말까 했는데 이럴 때 일수록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겠다 해서 가기로 했다. 마돈나가 노래를 잘 해서 그런 것일까. 영화 에비타 속의 노래들이 참 좋았는데 뮤지컬로 본다니 기대가 된다. 작은 동네 살다보니 이런 좋은 공연이 오면 놓치지 않고 가게 되는 장점이 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고 값도 싸다~으흐흐.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단다.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이 된다. 사람이 늙는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어딘지 불쌍해지는 것 같다. 언젠가 학교 식당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피자를 사 와서 혼자 드시는 것을 보았다. 피자를 한 손으로 들고 그걸 입에 가져가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가 많이 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피자를 겨우 입으로 넣는 그 모습. 그걸 다 드시고 지팡이 짚고 다리도 후들후들 하며 쓰레기통으로 가 빈 종이 접시를 버리고 아주 천천히 걸어가던 그 미국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왜 그리 처량해 보이던지. 아...그 할아버지에게도 나 같은 팔팔한 청춘이 있었겠지. 시간은 멈추는 것이 아니니 젊을 때 혈기가 넘칠 때 더 씩씩하게 살아야겠다. 그나저나 이번에 밴쿠버 다녀와서 불과 세 시간의 시차를 극복하는데 자그마치 사흘이나 걸린 것을 보면 나도 이제 서른 살이 된 것이다!

-밴쿠버에서 돌아와 보니 우체통에 익스프레스 메일로 소포가 왔으니 우체국에 와서 가져라가는 쪽지가 있었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소포를 보낸 것일까. 우체국에는 포장부터 아기자기하게 예쁜 소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일본에서 온유 언니가 또박또박 빼곡하게 카드 한 장과 함께 일본 과자를 보내준 것이었다! 이제 다섯 달 된 아들이 있고 동경대 연구실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온유 언니. 아기 키우랴 연구하랴 얼마나 바쁠텐데 그 와중에 나를 생각해서 비싼 익스프레스 메일로 카드와 과자를 보내주다니. 일본 과자답게 포장도 진짜 깔끔하고 예뻤다. 언니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