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26, 2007

Christmas 2007

이야기 하나.
내가 한 일곱살 쯤 되었을 때였던가. 잠실 우성 아파트에서 맞이했던 크리스마스였다. 바깥은 춥고 집은 따뜻해서 베란다쪽 유리창에 성에가 잔뜩 꼈다. 이미 깜깜해 진 밤이었고 우리 가족은 하하호호 크리스마스 이브를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엄마가 물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무얼 받고 싶어? 유리창에 적어둬. 산타 할아버지가 읽을 수 있게." 그 때 나는 '미미의 목욕탕'이였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게 꼭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또박또박 산타 할아버지가 잘 볼 수 있게 유리창에 적었다.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다고 한다. 그날 밤. 행복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 그 다음날 놀랍게도 나는 미미의 목욕탕을 받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도대체 왜 목욕탕이 가지고 싶었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랬다.)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로 내 글씨를 읽으시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이 좋았던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이야기 둘.
할머니께서는 동백꽃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이화동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면 파란색 커다란 화분에 제법 큰 동백꽃 나무가 현관 쪽에 있었다. 빨간 색의 동글동글한 꽃잎이 어린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어느 크리스마스날 아침. 그 동백꽃 나무 밑에서 10권짜리 어린이 백과사전을 발견했다.

이야기 셋.
싱가폴에서 맞이했던 크리스마스. 이 날 산타 할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에게 어린이용 우산을 선물해 주셨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우산에는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그 캐릭터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데, 산리오에서 나온 남자 여자 아이 천사 뭐 이런 것이었다. 내 우산은 파란색이었고 동생의 우산은 노란색이었다. 우산에 각자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글씨체가 엄마랑 똑같았다. 혹시 엄마가 산타인가 하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산타 할아버지 글씨가 어쩜 엄마랑 이렇게 똑같냐고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던 크리스마스였다.

이야기 넷.
열서너살 되었을 때였나. 크리스마스 아침에 온 가족이 교회에 함께 갔다. 예배가 끝난 후 큰이모네 가족을 만났다. 다 함께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날은 눈이 펑펑 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던 것 그리고 그래서 즐거웠던 것 만은 생생하다.

-미국의 크리스마스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땡스기빙이 끝나면서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선물 사기 열풍도 그렇고 우리 나라 추석에 집에 가듯 모두들 가족에게로 돌아가서 학교가 텅텅 비는 것도 그렇다. 어린이들만 선물을 받곤 하는 우리 나라와 달리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는 어른들도 선물과 카드를 주고 받는다. 그야말로 선물의 날이다. 나는 어제 고맙게 크리스마스 모임에 초대 받았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있는 엄청난 양의 선물을 보고 순간 이게 장식용인가 할 정도였다. 터키와 햄을 각종 샐러드를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후식으로 크랜베리 파이, 브라우니, 초콜렛칩 쿠키 기타 등등을 또 다시 배 터지게 먹었다. 선물로 보라색 장갑과 목도리 세트, 자스민 캔디, 코코아 가루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엄마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엄청 부드러운 토끼털이 달린 남색 코트부터 드레시한 치마까지 또 선물이 한 꾸러미 나왔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상업화 되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전히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슨 선물을 사 줄까 고민하며 고르는 정성이 좋아 보인다. 이제 곧 2008년이군. 진정 내가 서른 살이 되는 해이다. 윽.

6 comments:

Anonymous said...

따뜻한 이미지를 기억으로 가지고 계시군요.

올 연말도 주현씨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서른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네요. ^^

Unknown said...

주현.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구나. 나도 '선물'은 받지 못했지만 아내가 해준 너무나 맛있는 비프로브와 연어초밥 등과 리라와 함께 즐거운 성탄을 보냈답니다. 음. 지금은 다시 에세이가지고 영어와 씨름하느라 머리가 터지고 있지만. T.T

아무튼 서른이 된 것은. 그래도 축하해줄 일일듯 싶어!

http://blog.naver.com/jaeyuna/60009101159

참고삼아 예전 내가 서른을 맞으며

잉게보르크 바하만 '삼십세' Das dreissigste Jahr
라는 글을 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다시한번 이 '알뜻 모를 듯' 그래도 서른에 대해 나름대로 잘 해석해놓은 듯한

글을 읽으며 화이팅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해피 뉴 이어!

Anonymous said...

전화 좀 받으세욧!!!!

hedgehog said...

*언니-싱가폴의 크리스마스는 더욱 따뜻했겠지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재윤 오빠-비프로프와 연어초밥. 듣기만 해도 맛있고 행복한 크리스마스였겠어요. 미소천사 리라는 나날이 더 귀여워지고 있겠지요. 링크 걸어주신 에세이 잘 읽어봤어요. 서양인들도 서른에 감회를 느낀다는 게 새삼 신기하네요. Happy new year!

*M양-언제 단 답글인지 모르겠으나...어제 전화 안 왔던데? ^^ 새해에는 전화 좀 잘 받도록 노력하마 ㅎㅎ 워낙 전화가 안 오다 보니...전화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때가 더 많다는...불쌍한 사실을 참고바람.

Anonymous said...

오늘 또 안받음.ㅜ.ㅜ
이 정도쯤이면 거의 고의적 회피가 의심돼. :(
참고로 나 12월 31일에 혼자 연구실와 있어. 나만큼 불쌍해?

hedgehog said...

댓글 보고 전화기로 다가가 확인해 보니 전화가 와 있었군. 어쩜 내가 전화기 집에 두고 슈퍼 갔다 온 사이에 전화하냐? ㅎㅎ 지금 전화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