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0, 2007

December 10, 2007


-여차저차한 이유로 특이한 곳에 다녀왔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박사논문 연구와 관련해 사슴 도축하는 과정에 대해 알고 싶어진 J양은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 본 후 드디어 이 동네 사슴 전문 도축 아저씨를 발견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낚시를 한다는 사람은 봤어도 사냥을 한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사냥을 은근히 많이 한다고 합니다. 물론 합법적으로 총기를 구입해 사냥 허가를 받고 하는 것이지요. 곰 사냥철은 땡스기빙 전에 끝났다고 하고 지금은 사슴 사냥철입니다. 사슴을 잡아서 이 아저씨네 가게에 가져다 주면 40년 넘게 이 일을 해 온 전문가 아저씨가 쓱쓱 원하는대로 사슴 고기를 만들어(?) 줍니다. 내가 잡은 사슴 고기로 햄버거를 만들고 싶다--고 주문을 하면 이 아저씨네 가게에서 살을 잘 발라낸 후에 햄버거 고기로 다져서 줍니다. 소세지를 원하면 소세지로 만들어 주고요. 이 동네에서 태어나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그리하여 성도 이 동네 토착 성인 검모(Gummo)인 아저씨. 왼쪽은 아저씨의 아들인데 가업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검모 아저씨네 가족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뿌듯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하는 보기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저씨의 칼 다루는 솜씨 정말 멋있었고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열심인 온 가족들도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사슴 고기도 먹어봤어요. 고기 냄새를 싫어하는 J양은 순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막상 먹어 보니 소고기에 양고기를 섞어 놓은 듯한 맛이었습니다. 아침 7시부터 찾아가서 아저씨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질문에 질문을 늘어 놓았음에도 시종일관 친절하게 답해준 검모 아저씨. 고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도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하기 꺼려하는 일들을 해 주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아니면 삼겹살 갈빗살 항정살 먹을 수가 없으니 오히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사진 속에 보이는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도라가 된 기분입니다. 오늘 오후에 교수님들과 중요한 인터뷰가 있었는데 한동안 이것 준비하느라고 사진 속 도라 마냥 책가방 메고 학교로 뛰쳐가고 집에 와서 콕 쳐 박혀 읽고 또 읽고. 게다가 이번에는 친구들까지 괴롭혔습니다. 통계학 리뷰를 하다가 이해가 안 되길래 바로 두 군데 도움을 요청했지요. M양과 미시간의 닥터 박이 찍혔습니다. 흐흐. 둘다 어쩌면 그리 설명도 잘 하고 아는 것도 많은지. 바로 이해가 쏙쏙. 똑똑한 친구들을 둔 게 마구 자랑스럽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고마우이!

-8명의 교수와 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니 왜 그렇게 긴장이 되던지.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시작 못하고 준비해 간 종이만 바라보면서 버벅버벅. 그 존재만으로도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세계적 석학이 몇 분 계셨기 때문에 더 떨리더군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딱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니 진정되고 나중에는 내 연구가 왜 이렇게 흥미 있고 중요한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요. 말이 끝난 후에 무안할 정도로 혼자 지나치게 심취했습니다. 윽. 교수님들 표정이 딱 이랬습니다. '쟤가 별로 아는 건 없어도 진짜 연구 주제를 사랑하긴 하나보네.' 한 시간이 한 시간 반이 되고 결국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연구실 친구인 홀리와 안야 그리고 나-이렇게 셋이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집에 돌아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지금이 학자로서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시기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때에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 몇 년 간은 논문과 상관없이 들어야 할 수업이 많았고, 그리고는 논문자격심사 때문에 정신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도 알고 박사논문의 끝이 보입니다. 재미있어 하는 그걸 그냥 매일매일 하면 되니 얼마나 행운인가요. 이제 몇 년 안에 직장을 찾으러 잡 마켓(job market)에 나가게 될텐데 그러면 또 얼마나 스트레스 받을까요. 주변에서 박사 학위 받고 취직하려는 이들을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화려한 이력서가 있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더라고요.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고들 하는데 막상 이 분야에 들어와 보니 준비 정말 잘 된 사람들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행운은 그 중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걱정도 없고 학비 걱정도 없고 기타 등등 다른 걱정할 것도 없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네요. 그러니 잠이 부족하다 징징 대지 말고 머리가 터져 나간다고 투덜대지도 말고 같이 놀 사람이 별로 없다고 칭얼거리지 말고. 앞으로 몇 년 안에 휘리릭 사라져 버릴 이 소중한 시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오랜 만에 실컷 자고 내일 다시 책가방 멘 도라가 되어 학교 가야겠네요.

2 comments:

Unknown said...

존경스러운 J양, 역시 멋지게 잘 살고 있구나. 어떤 논문을 쓰기에 사슴 도축까지 연구를 해야하는지 궁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소중한 시간, 좋은 생각과 말들 잘 담아서 갑니다. 건강, 행복한 12월 되길!

PS> 근데.여기 답글 달려고 보면 밑에 뭔 단어 확인해서 쓰라면서 '단어'도 아닌 알파벳 나열들을 쓰라고 하는데, 가끔은 알파벳을 너무 꼬아놓아서 해독불능의 경우도 있더라고. 암튼. 네이버처럼 로그인은 안해도 되긴 한데...오히려 이러한 절차들이 로그인보다 까다로운 것도 같고. 암튼. J양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구글 blogger가 다 맘에 드는데 약간 아쉬움도 있는 듯 해서 그냥 해본 소리임...^^

나는 석사 논문을 '블로그'에 관해 쓸까 생각중이여서 요즘 블로그에 관심이 좀 많음.^^

hedgehog said...

*존경스런 리라 아버님(ㅎㅎㅎ), 영국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리라는 정말 미소가 너무 귀엽더군요. 아직 혼자 앉지도 못하는 아기가 사진기에 미소를 날리는 걸 보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답니다.

요즘은 영국 생활이 좀 나아지셨는지요?

구글 블로그. 저도 동감해요. 어떨 때는 아예 철자가 안 보이더라고요. 윽. 블로그에 대해 논문을 쓰신다니 기대가 됩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