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7, 2008
Classical music
-그저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나는 유투브가 아무리 대세라 하여도 동영상 보는 것에 별로 취미가 없는데 이 동영상 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아리랑을 연주하는 부분을 봤는데 마음이 찡했다. 아리랑이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인 것은 맞지만 솔직히 내가 어렸을 때 아리랑이 심금을 울린다던가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뉴욕필이 평양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괜히 슬퍼지기까지 했다. 원래 아리랑의 음색이 슬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면 한국 사람은 저절로 아리랑에 심취하게 되어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겹쳐져서인 것일까.
-그저께 평양에서 지휘한 로린 마젤이 예전에 요요마의 첼로와 함께 베를린필을 지휘할 때 녹음했던 음반 중에서 드보르작의 첼로 콘체르토 B 마이너가 있는데 그 음반을 요 며칠동안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이유인 즉슨 어제 그 노래를 들으러 갈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 폰티가 지휘한 국립 러시아 교향악단이 이 동네에서 어제 연주를 했는데 우리 과 삼총사 나, 아냐, 그리고 새라가 함께 갔다. 학생은 반값에 할인 티켓을 구할 수 있는데다가 무대보다 천장과 더 가까운 엄청 뒷쪽 아니 뒷쪽이면서 윗쪽인 곳에 좌석을 구매해서 얼마 들이지 않고 멋진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드보르작은 훗날 자기 형제의 아내가 된 여인(영어로 sister-in-law라고 되어 있어서 형의 아내인지 동생의 아내인지 모르겠다. 그 바람에 이런 어색한 표현을...양해 바람!)을 열렬히 사랑했었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애정은 평생동안 식지 않았는데 그녀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 노래를 작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드보르작이 이 곡을 보다 즐거운 멜로디로 계속해서 고쳐나갔다고 한다. 첼로로는 콘체르토를 만들 수 없다는 평생의 신념을 가졌던 드보르작이 결국 그 신념을 굽히고 자신이 사랑했으나 함께 할 수 없었던 여인에게 바치려고 작곡한 곡. 독일 출신의 젊은 첼리스트 클라우디오 보호르께즈가 첼로 독주를 맡았다. 우리 아빠가 좋아하시는 신세계 교향곡도 그렇고 이 노래도 그렇고 드보르작의 노래는 참 아름답다.
인터미션 뒤에 이어진 곡은 차이코스프스키의 심포니 4번 F 마이너였다. 얼마나 심하게 차이코프스키스러운지 늦은 시간이어서 솔솔 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팀파니 마구 두들겨 주고 커다란 베이스 북도 두들기고 심벌즈도 계속해서 꽝꽝. 잘 모르는 노래였는데 3악장도 참 재미났다. 서른 개가 넘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비올라, 첼로 그리고 8대의 베이스가 뚱뚱뚱뚱 계속해서 피치카토로 현을 튕기는 것이 재미났다. 바순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으며 오보에와 클라리넷도 참 듣기 좋았다. 플륫은 여전히 별로 그냥 그랬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취향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는 차이코프스키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운명이라며 그를 열렬히 따라다닌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차이코프스키와 그녀는 결혼을 하였으나 그 결혼이 원만할 리가 없었다. 결국 차이코스프스키는 그녀를 떠났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어서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가 바로 이 곡.
-엄마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많은 클래식을 듣고 자랐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서 클래식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냥 들으면 잠이 솔솔 오고 마음이 편해지니 좋았다. 하지만 유학 나와서 할 일이 별로 없어지면서 생긴 좋은 친구가 클래식 음악이다. 사실 아직도 모르는 노래가 훨씬 많지만 하나씩 배워가는 것도 재미나고 진심으로 노래가 좋아서 듣는 그런 기분도 좋다. 4월 1일에는 그 유명한 아이작 펄만이 온단다. 줄리어드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니 이곳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나보다. 삼총사가 그날 또 같이 가기로 했다. 무슨 곡을 연주하려나. 그 날은 꼭 맨 앞에 앉아서 노장의 땀방울까지 보고 말리라.
-약 한 달 전에 제출한 연구비 기금 프로포절이 통과 되어서 소액의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 조금 전에 중국어 시험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이런 기쁜 소식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Saturday, February 23, 2008
Amish
어제는 우리 과 학생들이 이 동네로부터 약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미쉬(Amish) 마을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대학원생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약 40여 명이 함께 찾아간 곳은 미국 사람 눈으로도 신기하다니 나같은 한국 사람 눈으로는 더더욱 신기한 그런 곳이었다.
-아미쉬 어린이들. from wikipedia.org-
일단 그 동네에 들어서자 사방 팔방이 깜깜했고 군데군데 마차가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요더(Yoder)씨네 집이었다. 턱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도록 기른 나이 지긋한 요더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했고 집에 들어서자 하얀 모자를 쓰고 파란 단색 원피스를 입은 요더 아주머니와 요더씨의 딸들이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까만 바지에 파란 단색 남방을 받쳐 입고 멜빵을 한 요더씨의 아들과 손자도 부엌일을 거드는 중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옆으로 길쭉한 테이블에 40여 명이 앉자 요더 아저씨는 그 우두머리 석에 앉으셨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셔서 우리 모두 식사 기도를 했다.
이날 나온 음식은 물론 모두 집에서 재료의 수확에서부터 끝까지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는 버터도 요더씨네가 기르는 소의 우유로 만든 것이었고 딸기잼도 직접 수확한 딸기로 만든 것이었다. 줄기콩과 간소고기를 볶은 것, 매시 포테이토, 고구마 으깬 것, 소고기 스튜, 크림소스 파스타, 오색 야채로 만든 피클이 주메뉴였고 후식으로 사과파이, 치즈케잌, 초콜렛케잌과 달달하게 절인 배에 커피가 곁들여 나왔다. 정말 맛있었다. 후식을 마치자 멜빵을 멘 아미쉬 손자들이 우리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Amazing grace" 찬송가가 인쇄된 종이였다. 요더씨의 지휘 하에 우리 모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러야 했다. 그 다음에 요더 아저씨는 우리에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어디 출신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를 말해달라고 했다.
-아미쉬 마을의 옥수수 수확-
이런 신기한 삶을 사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미쉬는 18세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스위스-독일 (가끔씩은 네덜란드)계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종교인데 이는 기독교와 매우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극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내에만 약 20만 명의 아미쉬가 살고 있으며 이들은 인구 증가가 가장 빠른 집단 중 하나라고 한다. 오하이오주에 가장 많은 아미쉬가 있다고 하고 그 다음이 펜실베니아라고 한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철저히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산다. 사유 재산을 최소화 하고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이들은 전기도 자동차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요더씨네 집을 밝히고 있는 것은 몇 개의 촛불 뿐이었다. 기계의 사용 역시 최소화 한다고 하는데 이는 기계에 의존하게 되면 그만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공동체의 의미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입는 옷도 단색인데 대부분이 짙은 파란색이나 검은색이며 남자들은 거의 멜빵을 한다. 입는 옷에 달린 단추의 수나 모양까지도 제한을 둔다고 한다. 아미쉬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아프면 이들이 직접 만든 전통약을 먹거나 동네 아미쉬 의사에게 간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아미쉬-
아미쉬는 8학년 이상의 교육은 거의 받지 않는데 이는 8학년까지만 다니면 아미쉬 삶을 영위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미쉬는 아미쉬끼리 결혼을 하는데 이 때문에 기형아가 태어나는 확률 또한 높다고 한다. 미국 내에 있는 20만 명의 아미쉬가 모두 18세기에 미국으로 건너온 단 200명으로부터 태어난 후손이기 때문에 그만큼 유전자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계속해서 집단 내 결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우리 생각에 젊은 아미쉬들은 이 생활을 싫어하고 도시로 떠나고 싶어할 것 같지만 아미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아미쉬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아미쉬 집단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데도 아미쉬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저속함에 찌들지 않은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나더러 이렇게 살라면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은 삶의 방식이었다.
저녁 식사가 모두 끝나자 원하는 사람은 빵이나 파이 혹은 아미쉬 스타일로 뜨개질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이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다보니 겨울에는 아무래도 생계 유지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소개하며 소량의 수입을 얻는다고 한다. 나는 맛있는 빵을 한 덩어리 샀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그저그런 빵도 3불이 넘는데 이건 2불 밖에 안하니 웬지 미안하기까지 했다. 마차가 즐비한 동네를 떠나 빵 한 덩어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니 잊어버리고 가지고 가지 않았던 사진기가 문 앞에 덜렁 놓여 있었다. 알고보니 아미쉬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진 찍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날이 풀리면 아미쉬 마을에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
Wednesday, February 20, 2008
Don't judge me!
*이 동네에서 내가 잘 가는 헌책방 겸 커피숍이 있다. 그곳에 가면 책장 사이사이에 소파도 있고 흔들의자도 있어서 아예 자리잡고 앉아 한참 이것저것 읽기에 딱 좋다. 인류학 책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어째 매번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 것일까. 오늘도 책을 네 권이나 샀다. 20불에 네 권. 게다가 하나같이 유명한 책들이니 사길 잘했지 싶다. 그나저나 읽기나 해야할텐데.
*요즘은 내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박사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S양은 원하던 좋은 학교에 교수직을 잡았고 역시 박사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P양은 아기를 가졌단다! K양은 무사히 첫 아이인 뽀야를 낳았고 Y언니도 무사히 둘째 딸인 상하를 낳았으며 H언니도 역시 무사히 둘째 딸 다연이를 낳았고 O언니는 첫 아들 윤재를 낳았다. 그야말로 경사났네 경사났어~모두모두 축하합니다! 그리고 모두모두 참말로 부럽습니다!! 나에게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호호.
*두 번의 이혼과 불임진단. 이후에 정자기증을 받아 마흔 두살에 첫 아이를 낳은 허수경. 그녀의 선택을 두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처음부터 아빠 없는 아이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부터 이상한 아빠보다는 없는 아빠가 낫다는 생각까지. 내 생각에는 허수경 자신만큼 이 사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없을 것 같기에 그녀의 선택을 지지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남편은 없어도 되지만 아이에게 아빠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엄마 아빠가 함께 키우는 아이보다 제 아이를 더 잘 키울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짐을 아이에게 지워준 것이 너무나 미안하지요. 하지만 누구나 한 가지씩 가지고 있는 그런 결함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힘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요." 멋지다. 그래도 혼자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는 모습을 보니 쓸쓸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해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도 하고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자라는 아이도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 가정에서 자라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엉망진창으로 상처를 받고 자라는 아이도 있고 아예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도 있으며 신애라와 차인표의 아이들처럼 친부모 혹은 입양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도 있다. 어떻게 자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 가장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있기는 한 것일까. 겉으로 볼 때는 모자라 보여도 속내가 알찬 경우도 있고 겉으로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보여도 속내가 폭탄 맞은 집 같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인생의 목표 중 하나가 남편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 믿으며 그 사실을 남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남편도 그녀도 참 불행해 보인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 중 하나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 영어로 judge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이는 사전에 나오는 뜻 그대로 '판단하다'의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친구끼리 이야기할 때도 "I hope you don't judge me." 혹은 "Please promise you won't judge me."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데 이는 나의 말 또는 행동을 통해 '쟤는 저런저런 사람이구나' 하면서 네 기준으로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심각하게 "You are being judgmental."이라고 하면 대판 싸움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리라.
우리들의 가장 흔한 실수가 '나중에 이것이것을 꼭 고치도록 하고야 말겠어' 혹은 '지금은 안 좋아 보이지만 내가 어떻게든 노력하면 저걸 고칠 수 있을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자신더러 남의 일면을 고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고 한다면 그게 그리 쉽게 되겠는가. 내가 싫어하는 상대방의 어떤 면을 알게 된 상태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던지--이 둘 중 하나를 해야 현명한 것이지 내 마음에 들도록 그 사람을 바꾸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심하게 표현하면 오만이라는 것.
나는 어떠했는가.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면이 없었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물론 지금도 친구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고 가끔씩 참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남을 judge 할 때가 있다. (역시나 행동보다는 말이 백만배 쉽다!) 하지만 지난 일 년동안 스스로 가장 많이 한 연습이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 것이지 싶다. 하물며 핏줄을 나눈 가족도 서로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사는데 내 친구가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인가. 예전 같으면 누구는 저래서 맘에 안 들고 누구는 또 이래서 싫고 하는 생각들을 했을텐데 요즘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긴다. 나 역시 남들에게 완벽한 인간일 수 없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 역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인연이 진짜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Sunday, February 10, 2008
Feb.10, 2008
-아침에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남대문이 불에 활활 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내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에 완전 무지하게 살고 있음을 감안해 엄마가 생중계를 해 준 것이다.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 가서 생중계를 보니 참말로 마음이 안 좋았다. 저렇게 오래된 건물이 순식간에 허무하게 그냥 휙 없어지고 있었다. 국보 1호가 허망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새삼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느꼈다.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미국은 특히 우리 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집들이 나무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불조심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는 눈보라가 펑펑. 저곳에서는 불길이 활활.
Saturday, February 9, 2008
Happy new year!
Friday, February 1, 2008
My favorites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날의 할 일들을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기억을 착착 해 내곤 했는데 이제는 할일이 지나치게 많아지기도 했고 머리가 나빠진 것 같기도 하고 해서...조금 후에 해야 하는 일조차도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거 원.
-나같이 연구기금이 넉넉치 않은 학문 분야에 종사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얼마나 연구비를 잘 따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훗날 직업을 찾을 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조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연구비를 타는 것이 대학원생 때부터 중요하다. 내 비록 아직 주요 출판 논문은 없지만 지금까지 연구비 받아내기에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특히 얼마 전에는 그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우리 팀의 산동성 연구를 지원해 주겠노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기쁨도 따라주었다. 운이 좋아 멋진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도 실어준단다.
며칠 전에 또 하나의 연구기금을 신청했다. 부디 이번 연구비도 나에게 오는 행운이 따라 줬으면 좋겠다. 어제는 3월 중순이 마감인 또 하나의 연구기금을 발견했다. 이것도 한번 지원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정신이 없다. 예전에는 연구비 신청하는 게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이것도 조금씩 재밌어지고 있다. 단지 돈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왜 내 연구가 중요한지, 왜 나에게 돈을 줘야 하는지에 대해 쓰는 것이다 보니 마치 내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구비 혹은 장학금이 나에게 돌아올 때의 기분은 정말 좋다.
-연구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것이다. 그동안은 연구 성과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을 낼래야 낼 수가 없었는데 이제 서서히 자료가 모이면서 논문을 쓸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저널에 논문을 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런 논문은 사실 쓰나마나이다. 논문을 싣기가 얼마나 까다로운가에 따라서 학술지의 수준이 결정된다. 일단 논문을 쓴 후에 원하는 학술지에 보내면 그 학술잡지의 편집자들이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서너 명에게 접수된 논문을 보낸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원고를 읽어보고 과연 출판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져서 편집자에게 돌려 보낸다. 이 과정은 거의 대부분 익명으로 진행되는데 이를 피어 리뷰(peer review)라고 부른다. 이 과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피어 리뷰를 통과하면 학술지에 내 논문이 실리는 것이고 통과를 못하면 아쉽게도 탈락! 그리하여 피어 리뷰가 없는 학술지에는 논문을 내나 마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나의 학문 이력서에는 "피어 리뷰 저널에 실린 논문"이라고 해서 적어야 한다. 내가 만든 저널에 내가 논문을 싣고 그것을 마치 중요한 업적인 냥 주루룩 나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황우석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이 그리 큰 파장을 불러왔던 것도 그것이 피어 리뷰 과정조차 보란 듯이 통과하고 저널에 실렸기 때문이다.
올해 나의 목표는 피어 리뷰 저널에 논문을 최소한 두 개 내는 것이다. 어찌어찌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우리 학계에서 가장 좋은 저널이라고 불리는 저널 두 군데에 논문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피어 리뷰가 황당하게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그리하여 할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경쟁심리와 성취감 같은 것들이 묘하게 교차하면서 해 볼만 하다는 의욕이 생긴다.
-요즘은 하루종일 인류학과 고고학만 생각하고 산다.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거야!